'로키'(low-key)로 안정을 유지하는 삶에 대하여

by 돼지터리언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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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단계(로키)에서 안정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단상>


요새 근원 모를 우울감이 스멀스멀 올라옴을 자주 느낀다.


나는 요즘 미술관에 가서 한 작품에서 다음 작품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혹은 책을 보며 한 챕터에서 다음 챕터로 넘어갈 때 그 틈새에 멈춰 서서 이 우울감의 근원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곤 한다.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하듯 통장을 뺏겼기 때문일까?라고도 생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근본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다지 금전 지향적 인간이 아니기도 하고, 돈은 내 삶에서 꽤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최상위에 있지는 않다.

그냥 둘까 하다가 행여나 병이 될까 우울감의 근원이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을 잇고, 잇고, 이어보았다.


지금껏 떠올려 본 것들은 이렇다.

자존감? 뭐 나쁘지 않다.

인정욕구? 집에서야 괄시받지만 밖에서는 나름 괜찮다.

직장생활? 그냥 밥값은 하고 산다.

대인관계? 좀 줄여야 할 정도로 과하게 잘 지낸다.

가족문제? 엄청나게 화목하진 않지만, 끈끈함은 있다.

자식문제? 아직 애기들이라 그런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

애정문제? 신장이 아파서 사마천류가 되기 직전인지라...

취미문제? 바쁜 와중에 잘 챙기고 있다.


생각의 타래를 쭉 따라가 본 결과 건강이라는 종착역에 멈춰 선 것 같다.

확실하진 않아서 '것 같다'라는 서술어를 붙였는데 그 이유는 아직 이게 맞는 것인지 아닌지 잘 몰라서다.

외교 기사를 쓰다 보면 '로키'(low-key)라는 용어가 있다.

뭔가 자극하지 않고, 과잉되지 않고, 잔잔하게 꾸물꾸물하고 있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요즘의 내 건강상태를 로키라고 표현하면 딱 맞겠다.

이전에 내가 아주 건강한 상태에서 몸을 마구 썼다면, 지금은 아주 낮은 단계의 건강 상태에서 안정을 이루고 있다.

몸 상태가 기운이 탱천 하거나 괴력을 발휘할 수는 없지만, 잔잔하게 꾸물꾸물 사지를 구동하는 데는 무리가 없는 상태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들 하니 내 몸과 마음 모두가 로키 상태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이미 아프단 소리를 수도 없이 했으니 다들 알겠지만, 내 몸은 예전 같지 않다.

불혹이 다가올수록 그런다는 사람도 있고, 그냥 내가 몸을 함부로 써서 그런다는 사람도 있고, 선천적으로 약했을 수도 있다는 소수 의견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실사구시,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내 몸은 좀 후진 상태가 됐다.

다만, 지금은 급격한 바이오리듬 하락으로 최근 몇 달간 겪었던 혼란의 상태는 넘어선 것 같다.

튼튼한 몸인 줄 알았는데 허약한 몸이 돼버린 것 같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자존감이 워낙 맥스 상태여서 그렇지 자존감도 많이 떨어지고, 아침에 거울을 보다가 늙고 병든 노새 같은 나를 발견하면 흠칫흠칫 놀라기도 한다.

그래서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우울감이 어쩌면 바닥나버린 체력과 나빠진 건강상태에서 온 게 아닌가 합리적인 추론을 하는 것이다.


평소 내 페북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나는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는다.

어떤 이는 열정적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과욕이라고도 하는데 그냥 평소 지론이 '눈 떠 있는 시간에 뭐라도 하자'이다 보니 그런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내가 부산하다고 하는데 의외로 별로 부산하거나 그렇진 않다.

행위 간 움직임이 빠를 뿐이지 무언가를 할 때는 꽤 평정한 상태에서 모든 일을 한다. 집중력과는 다른 것인데 의외로 말투도 느리고, 행동도 느리고 해서 정신 사납게 굴거나 그러지 않는다.

어쨌든 이런 엉망인 몸 상태가 그간 내가 느꼈던 우울감의 원천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처음에는 몸과 의욕이 엇박자가 나는 게 짜증이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냥 이 로키 상태의 몸을 받아들이고 적응해서 살고 있다.

아니 '살아지고 있다'가 더 맞겠다.

아침에 혈압약을 안 먹으면 하루 종일 기운이 없고, 밤에 과하게 술을 마시면 다음 날 뻗어 버리니 몸을 함부로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게 나쁘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전보다 내 몸을 잘 살피게 됐으니까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려 자기 방어 기제가 발동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정말로 로키 상태가 나쁘지만은 않다.

건강뿐 아니라 권력, 업무, 돈, 사람 등등 모든 것이 이러하지 않나 싶다.

한껏 손에 쥐고 있다가 부지불식간에 손에 쥔 것들이 시나브로 빠져나가 버리면 그제야 여남은 것을 붙들고 어여삐 여기는 심리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지 않고 낮은 상태에서 안정을 되찾은 것이다.

안빈낙도라 했던가.

이런 상태가 되고 보니 우선순위를 정해 몸을 쓰고, 체력이 넘치던 이전보다 절제를 하는 지혜를 배우게 됐다. 결핍이 주는 이로움 같은 거다.


전에 명의 한 분이 나에게 이런 소리를 했다.

"네 몸이 하는 소리를 잘 들어야지 그러다가 골로 간다"

그 뒤로 열심히 몸과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몸의 대화 말고 몸과의 대화다.

자기 전에 누웠을 때 그러니까 페북 앱을 끄고 진짜로 누웠을 때 나는 가만히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몸에게 말을 걸어 본다.

"어디 아픈 데는 없니?" 그러면 저기 단전으로부터 또렷한 목소리로 이런 답이 돌아온다.


"배고파"


아. 한결같은 나새끼.

#단상 #몸과의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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