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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Nov 30. 2018

공감능력은 퇴화한다…그래서 단련해야 한다


<공감의 근육을 키워보는 나에 대한 단상>

    '공감에도 근육이 있다. 놔두면 빠져버리는 근육이 말이다'

    애를 키우다 보면 가끔 괜스레 애들이 예뻐서 이런 장난을 한 번씩 하곤 한다.

    갑자기 슬픈 척을 하면서 우는 시늉을 하는 거다.

    그러면 처음에는 씨~익 웃던 아이가 눈치를 슬슬 보다가 이내 큰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울어 버린다.

    '감정 동화'

    아이들은 감정 동화 능력이 뛰어나다. 우리 집도 성격이 예민하고 섬세한 첫째는 무섭고 으스스한 것을 좋아하는데 볼 때마다 감정이 동화해 무서우니 꼭 그런 것을 볼 때면 동생을 옆에 앉혀 두고 보려 한다. 또 동생이 엄마한테 혼나면 저만치 세 발자국 정도 떨어져서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한다.

    냉담 그 자체인 와이프를 닮은 것도 아니고, 아무리 슬픈 영화를 봐도 절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고 와이프에게 핀잔을 듣는 나를 닮은 것도 아닌데 잘도 그런다.

    씩씩하고 밝은 둘째는 좀 다를까. 아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지 쉽게 감정 동화를 일으킨다. 이런 것으로 봤을 때 감정 동화, 다른 말로 공감능력은 어려서는 풍부하다가 자라면서 점점 퇴화하는 것 같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아마도 먹고 자고 노는 거 외에는 신경 쓸 것이 없는 어린 시절에는 자기를 다 둘러보고도 감정이 남아서 남까지 바라볼 여유가 있기 때문일 거다. 그러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입, 대학교, 취업 준비와 대학원 준비, 취업, 연구실 생활 등등을 거치면서 자신마저도 다 둘러볼 여유가 없어 지면서 우리는 감정 동화 능력을 잃는 것일 수도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내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약간 소시오패스 끼가 있다. 뭐 대부분 사람이 이런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하니 놀랄 일은 아니다.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면, 나는 솔직히 웬만한 일을 봐도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고 우선 당장 그 일을 처리하고 해결하는 것이 눈에 들어오지 같이 주저앉아서 넋두리하거나 같이 울어주거나 그러지를 못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 내 감정을 표현하자면, 

    '띳, 띳, 띳, 띳, 띳, 띠~~~잇, 띳, 띳, 띳, 띳, 띳' 이라고 할까. 나름 충격적인 소식이나 장면을 듣고, 보더라도 순간적인 동요만 있을 뿐 금방 평정심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남이 나에게 고민이나 고통, 우울감, 분노, 슬픔을 털어놓을 때 잘 공감하지 못한다. 그냥 내 입장에서는 '그래...?' 정도랄까. 그리곤 앞에 앉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에 집중하기보다는 이 사람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계속 생각을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이야기를 멈추거나 내 말소리를 듣고자 할 때 생각했던 것을 꺼내 놓는다.

    이런 나를 눈치채는 사람은 나를 따뜻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약간 무서운 사람으로 본다. 마치 와이프가 나한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이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공감을 잘 못 하는 나는 이런 상황이 편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게 굉장히 거북스럽고, 기분이 나쁘고 그렇다. 아. 좀 진심으로 위로를 해줘야 하는데 이게 잘 안되네. 하면서 죄책감도 들고, 어떻게 해야 하나 싶고, 그렇다.

    어느 날은 이걸 좀 고쳐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왜 공감을 못 하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상사에서 가장 많이 공감을 바라는 사안을 먼저 살펴봤다. 

    인간관계, 금전, 가정불화, 목표 성취 실패, 건강 등 정도가 추려졌다. 사람은 사람마다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역치가 다 다르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웬만한 일에는 크게 동요되는 타입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감을 원하는 사안들과 대비해 분석해 보니 나는 태어나서 한량인 우리 아빠처럼 독특한 사람을 본 적이 없고, 돈도 없어 볼 만큼 없어 봤고,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으며, 삼수를 하고도 25살이 돼서야 대학교 1학년을 다닌 수험의 역사가 있고, 큰 수술도 해봤다. 

    이런 과정을 넘어오면서 힘들었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어찌어찌 위기의 순간마다 주변 도움을 받아서 맑고, 깨끗하고, 자신 있게, 고비를 넘겨 왔다. 그러다 보니 그냥 뭐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성향이 나도 모르게 생긴 것이다.

    생각의 고리를 여기까지 늘어뜨리고 나니 '그럼 나보다 더 큰 일, 더 힘든 일, 더 고통스러운 일, 더 슬픈 일을 겪은 사람한테만 공감해야 하는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대답은 당연히 '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고민을 다시 한 달 정도 했던 거 같다.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그런 척이라도 해보자'였다.

    먼저 주변 사람한테는 쑥스럽기도 하고, 걸릴 확률도 높으니까 취재원들을 만나 감정 동화 연습에 들어갔다.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여 주고, '아이구, 아이고' 추임새를 넣어주고, 그래도 눈물은 안 나왔는데 어쨌든 눈알이라도 빨갛게 붉히는 시늉을 했다. 한달, 두달, 세달, 네달, 다섯달, 그렇게 반년. 이거 되는 건가? 의심이 들었지만, 뭐 계속해서 여섯달, 일곱달, 여덟달, 아홉달... 한 일년 반은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금씩 무쇠같이 단단할 것 같던 마음에 '금'이 가는 거다. 가식 덩어리 같던 표정에 진심이 조금씩 담기고, 몸짓이나 손짓 같은 제스쳐도 자연스러워졌다.

    일 년 반 동안의 트레이닝 기간 감정 동화 요령이 하나 생겼다. 상대가 슬픔이나 고통을 호소할 때 나의 아킬레스건인 엄마나 첫째가 비극적인 상황을 맞았다고 상상하며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그러면 쉽게 상대의 감정에 동화가 되고 공감이 됐다. 처음에는 호모사피엔스가 되기 위해 공감 훈련을 시작했는데 나중에 보니 내 속에 쌓인 독이 스멀스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럼 이제는 진심으로 남의 고통에 공감하느냐고 내게 묻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대답은 '아니다'이다. 

    하지만 이제는 남의 슬픔이 보이고, 아픔이 보이고, 고통이 잘 보인다. 어려서 있던 공감의 세포가 살면서 다 괴사한 사람도 공감 근육을 되살리고 크기를 키우면 사람 구실은 하고 살 수 있는 거다.

    최근 종종 논란이 되는 갑질과 부모의 거울과도 같은 아이들의 비인간적인 범죄들이 자꾸 눈에 띈다. 초등학생 어린아이가 기사 아저씨에게 막말을 하고, 보육원 아이들에게 반 친구들이 '세금충'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처를 주고, 왕따시키던 아이가 자기 때문에 죽었는데도 그 아이에게서 뺏은 점퍼를 입고 경찰 조사를 받으러 오고, 다 그 아이와 부모가 공감의 근육이 죽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도 공감의 근육을 방치해두면 언제 어떻게 괴물이 될지 모른다.

    가족, 친척, 친구, 혹은 그냥 옆집 이웃에게 관심이 정말 없더라도 그들의 아픔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위로하는 훈련을 해보자. 공감의 근육은 훈련을 통해 충분히 키워낼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리 모두 괴물이 되기 전에 공감 수련의 방으로 가자.

#단상 #공감의근육 #영차영차 #우리함께만들어가요아름다운세상 #수고했어오늘도아무도너의슬픔에관심없대도난늘응원해수고했어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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