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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Nov 27. 2018

직업은 꿈이 아니다? 나만의 발할라를 찾아서

#단상

<꿈이 있고, 그 꿈을 믿는 나에 대한 단상>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 확실히 있습니다'.

    "너 꿈이 모니?"

    어려서부터 많이들 들어본 질문이자 인생 전체에 걸쳐서 인간이란 존재를 괴롭히는 난제다.

    25살이란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다 보니 후배와 동생들 학업상담, 진로상담, 연애상담까지 온갖 상담을 다 해봤다.

    그중 후배들이 가장 힘들어 갈피를 못 잡는 것이 '앞으로 무얼 하며 살까'에 대한 고민이다.

    내가 나이를 먹어봐야 그들보다 너덧 살 더 먹었을 뿐이다. 나조차도 내 장래가 어떨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의 물음에 시원스레 답해줄 수는 없었다. 그저 그냥 들어주고 특정 직업에 관한 거면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하면서 겪었던 내 경험담을 이야기해주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내가 꿈꿔 왔던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때는 2007년 대학교 2학년 2학기. 무척이나 무더웠던 상하이에서의 일이다.

    별다를 것 없이 무료한 대학생활을 흘려보내던 나는 2학년 1학기 비루한 삶의 변화를 찾아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어학연수 후 방랑벽이 붙었는지 지루한 삶을 탈피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덜컥 코트라 상하이 무역관에 있던 선배에게 연통을 넣고, 무작정 인턴을 하겠다며 상하이로 찾아갔다. 지금은 뭐 시험도 보고 그러던데 당시에는 다 그렇게 인턴을 했다.

    당시 상하이에는 록수의 절친인 Y양이 있었고, 그 Y양의 남자 친구이자 Y양 교회 목사님 아들인 L군이 상하이 한인 교회에서 숙식하며 살고 있었다.

    록수도 연수가 필요했던 차라 우리 둘은 함께 상하이로 건너갔고, 두 친구의 도움을 받아 살집을 구하려던 참이었다.

    공항에서 한인 교회까지 찾아간 우리는 커다란 여행용 가방 두 개를 교회 부속실에 대충 부려 놓은 뒤 인근 신장(新疆) 식당에서 밥을 먼저 먹었다. 상하이의 여름이 늘 그렇듯 그날도 비가 왔는데 록수와 Y양은 먼저 교회로 돌아가고, 나와 L군이 집을 보러 돌아다녔다.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다가 세 번째 들른 부동산에서 느낌이 이상해 어깨에 멘 작은 가방을 뒤져 봤는데 정착비로 환전해 온 160만 원이 든 농협 봉투가 통째로 사라진 것 아닌가.

    서둘러 교회로 돌아가 여행 가방을 샅샅이 뒤져봐도 농협 봉투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신장 식당에서 의자에 가방을 잠시 걸어 뒀는데 그때 손이 탄 것 같았다.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낙담하기도 해서 일단은 한국에 연락해 선배들에게 돈을 좀 빌리고, 코트라에 계신 P선배께 말씀드려 월급 30만 원을 가불해 받기로 했다.

    한국에서 돈들이 당도하기까지 시일이 며칠 걸리고, 코트라 출근까지도 사나흘이 남았던 터라 록수는 Y양의 자취방에 나는 L군이 사는 20평 남짓한 한인 교회에서 지냈다.

    L 군이라는 친구를 나는 아직도 굉장히 존경한다. 나랑 동갑인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도 일본에 건너가 막노동을 해 돈을 모으고, 중국으로 건너와서는 공부와 일, 교회 봉사를 병행하며 고학생 생활을 했다. 나중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연수까지 제힘으로 마쳤다. 게다가 이런 와중에도 진짜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만큼 착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알고, 나 같이 황당무계한 실수를 한 일면식도 없는 여자 친구의 친구의 남자 친구도 따뜻하게 맞아 주는 그런 친구였다.

    처음 하루 이틀은 L군과 서먹서먹했는데 이불 같이 덮는 정이라는 것이 무서운 게 순식간에 우리는 서로의 꿈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돈과 집을 구하느라 그 무더위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 지친 하루를 마친 뒤 L군과 본당에 이불을 펴고 누워 이야기하는 시간이 오면 한낮의 피로가 싹 가시고 참 좋았다. L군은 그때부터 또렷한 꿈이 있었다. 반면, 나는 당시 어렴풋이 '이러이러한 것을 하고 싶긴 한데'라는 생각만 있었지 뭔가 정리가 되진 않았던 때다.

    L군의 꿈은 중국에 기독교 교육기관을 지어 운영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땐 아무튼 그랬다. 아마 이 친구 성격이면 절대 변했을 것 같진 않다. 어떻게 학교를 짓고, 선생님을 구하고, 돈을 모으고, 꽤 구체적인 계획에 나는 옆에서 우와 우와만 외쳤다. 그러다 문득 학원에서 애들을 가르치던 시절 가졌던 '나중에 꼭 애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어설픈 내 꿈을 L군의 꿈에 포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L군에게 진지하게 내 꿈을 말하고, 꿈을 합치자는 의사를 건넸다.

    "L군, 그럼 나중에 내가 우리 집 건사를 좀 해놓고, 네가 만약 학교를 만들면 거기서 선생님 해도 돼?"

    "아. 나야 와주면 고맙지"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그런 로또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게 나에게도 꿈이 생겼다.

    이 꿈은 록수와 L군을 제외하고는 들어 본 사람이 거의 없다. 

    내가 사실 이런 꿈을 갖게 된 것은 군대와 학원과 과외를 병행하던 3 Job 시절 때다. 당시 내가 일하던 학원은 고향에서 꽤 부촌에 있었는데 맞벌이하는 집 아이들이 학원이 끝나면 PC방을 전전하거나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방황하는 게 보기 딱해 수업이 끝나면 교실 뒤쪽에 앉혀 두고, 숙제를 봐주곤 했다. 이런 애들 대부분은 이 동네에 사는 것이 아니라 교육환경이 좋은 동네를 찾아온 아이들이었고, 어머님들은 대게 마트 캐셔 일 같이 고된 일을 하셨다. 

    나도 힘들게 공부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나중에 꼭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도 최고 수준의 교육을 말이다. 또 이를 잊지 않기 위해 그 이후 가입하는 모든 사이트의 아이디는 'kjbsem=김진방 샘'이 됐다. 영어를 못해 'sam'을 써야 하는데 'sem'을 썼었는데 지금까지 그 아이디를 유지하고 있다.

    다시 상하이 시절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나는 소매치기를 당하긴 했지만, 대신 L군과 본당에서 자며 꿈을 찾는 행운을 얻었다. 그 뒤로 무사히 인턴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나는 달라져 있었다.

    진로나 직업에 대해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너 꿈이 모니?"라는 질문을 하고, "행시 패스요, 외시 패스요, 대기업 취직이요, 은행 취직이요'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그런 꿈 말고, 그걸 통해 하고 싶은 일이 뭐니?"라고 되묻고 이걸 잘 생각해 보자고 했다.

    그럼 꼭 "그러는 형은 꿈이 뭔데요?"라고 물어 오는 후배들이 있다. 그때마다 L군과 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리고 이 꿈 때문에 나는 지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무슨 꿈이 그래요? 그렇게 두루뭉술한 게 무슨 꿈이야"라고 하는 친구들이 꼭 있다.

      나는 다시 "잘 생각해봐. 나 자신만을 위해 달려가면, 가다 힘들면 쉬어버리면 되지? 왜냐면 그 피해는 내가 F 학점을 받으면 끝이니까. 하지만 저 꿈을 생각하면 게을리 살 수가 없다"

    "무슨 소리에요?"

    "그러니까 아직은 없는데 미래의 내 제자들의 똘망똘망한 눈을 생각하면 늦잠을 잘 수도, 공부를 게을리할 수도 없다니까. 나는 그런 꿈을 갖고 있다"

    이런 대화를 하면 알아먹는 친구는 '아~'하고 가고, 아닌 친구는 '뭐야?'하고 돌아간다.

    내가 공항에 있다가 기자로 이직할 때 가장 큰 이유는 록수와 집안을 건사하는 것이었지만, 기자가 되면 온갖 세상만사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이유였다. 이런 경험은 나중에 고스란히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가진 아이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꼭 꿈이 경천동지할 거대한 목표거나, 원대한 인류애를 발현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내 가족을 위해,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주변에 온정을 나누기 위한 것일 수 도 있다. 다만, 내 삶의 방향을 잡아주고, 흐트러져도 다시 일으켜 줄 수 있는 삶의 원동력이 될 필요는 있다. 나만의 발할라를 하나는 만들어 보자.

    나는 이 꿈을 생각하면 지쳐 쓰러져 있다가도 정신이 번쩍 들고, 언젠가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똘망똘망한 눈동자의 아이들 생각에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다.

   영어로 꿈은 DREAM이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고, 내 마음대로 이뤄진 세상이란 뜻이다. 꿈은 그래야 한다.

   중국어와 일어로 하면 꿈은 '멍'(梦), '유메'(夢)다. 약간은 흐리멍텅하고, 몽롱해 분명하진 않지만, 어딘가에는 있는 그런 것이다. 꿈은 그래야 한다.

    직업은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고,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인생을 규정하진 않는다. 진짜 꿈이 생기면 내가 기자여도, 공사판 인부여도, 아이를 키우는 주부여도, 운동선수여도, 화가여도, 음악가여도 이는 모두 과정일 뿐이다. 빠르게 갈 수도 있고, 한참을 뱅뱅 돌아갈 수도 있다. 대신 꿈을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록수와 결혼을 하고, 애를 둘이나 낳고, 부모님을 건사하면서 내 꿈이 살짝 현실에 묻힌 때도 있었지만, 나는 이 꿈을 한 번도 잊은 적은 없다.

    20대까지 이런 꿈을 꾸면 몽상가고, 30대에도 이 꿈을 유지하면 철이 없는 거고, 40대가 지나도 잊지 않는다면 위험한 거고, 애들이 다 크고 장성한 50대가 지났는데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면 이 꿈은 'real'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 확실히 있습니다'

#단상 #꿈 #너꿈이모니 #아니그거말고진짜꿈 #꿈이현실이되는순간 #선민아_출국전보고못봤네 #화이팅

++혹시나 제 꿈이 미뤄지고 미뤄져 은퇴한 이후에도 제가 헛짓 거리를 하고 있다면, 어디서 만나든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세요. 어느 날 갑자기 길을 가다 별이 보이면 짐싸서 L군한테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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