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에선 뭘 배우죠?

by 김은진


사람들에게 방송작가로 일했다고 하면 "방송 작가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라는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 사실 방송작가가 되는 방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방송과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사람이 방송계로 진입할 수 있는 가장 쉽고 안전한 방법은 아카데미를 수료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방송국에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아카데미'를 다녔다. 대학 4학년 2학기였다. 마지막 학기라 학점을 인터넷 강의를 듣는 것으로 대체했다. 여름방학인 7월부터 12월까지 수강하는 과정에 무려 수강료가 365만 원. 그래도 이왕 내 꿈에 투자하는 거 다른 방송사 아카데미보다 **아카데미가 커리큘럼이 좋다고 하니 큰돈을 들여서라도 좋은 곳에서 배우고 싶었다. (물론 커리큘럼이 좋다는 건 네이버 지식인에서 본 정보였다)


부모님을 겨우 설득해 수강을 신청하니 생각지 못한 면접 과정이 남아있었다. 아니 무슨 배우러 가는 아카데미에서 면접을 보지? 싶었지만 반드시 면접을 통과해야만 수강할 수 있다고 하니 별 수 없었다. 신천역에 내려 인터넷으로 보고 온 약도를 따라 아카데미를 찾아가니 작은 면접장소에 대기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구성작가 과정 담임선생님과 아카데미 수강을 희망하는 학생 4명이서 1:4 면접을 진행했다.

"소녀시대와 2NE1 중에 누가 오래갈 것 같나요? "

풉.. 아니 이게 무슨 얘기인가 싶어 질문을 듣고 살짝 당황했는데, 다들 표정 변화 없이 한 명씩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소녀시대는 멤버가 9명이니 개개인의 다양한 매력들을 보여주면 더 인기가 오래 지속될 것 같습니다, 2NE1은 소녀시대보다 음악적인 색깔이 뚜렷하니까 음악성으로 더 오래 사랑받을 것 같아요."

다소 황당한 질문에도 진지하게 면접자들이 나름의 이유들을 이야기하는 걸 보고 이 상황이 시트콤 같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아카데미에 합격해야 수업을 들을 수 있으니 머릿속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계속 머리를 굴렸다.


이어지는 질문들도 좀 황당했다. 슈퍼주니어 멤버 중에 누굴 가장 좋아하냐, 멤버 00이 왜 인기가 많은 것 같냐 이런 식의 연예인 질문들이 이어졌다. 30분 정도 진행된 면접이 끝나고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방송작가를 왜 하려고 하는지,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은지 등을 물어볼 줄 알고 준비해 갔는데 허무함이 밀려왔다. 나름 한 학기 등록금에 맞먹는 금액을 투자했는데... 본전을 뽑을 수 있을 것인가 싶었다.


이 불안하고 찝찝한 우려는 곧 사실이 되었다. 아카데미 과정 6개월 동안 '도대체 이런 걸 왜 하지?' 싶은 순간들이 이어졌다. 학생들을 평가해 점수를 매기고 점수가 높은 학생들을 우선으로 취업 추천을 해주겠다는 명목 하에 내려진 미션들은 지금 생각해도 황당한 것들이었다.


<오늘 안으로 명함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인증사진 찍기/ 트위터 팔로어 400명 만들기/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야구르트 아줌마 찾기/ 운동장에서 남산타워가 보이는 초등학교 찾기 >


물론 이런 미션들 뿐만 아니라 현직 작가들이 와서 하는 수업들도 있었다. 하지만 강연하는 작가님들도 하나같이 이렇게 강의실에서 이론적인 내용을 배우기보다 실전에서 같이 일해야 터득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이야기하며, 아카데미에서 배우려고 하지 말고 취업 자리가 나면 빨리 취업을 하라고 조언해주곤 했었다.


다행히 수강 6개월 동안 취업 추천이 드문드문 이어져 절반 정도는 아카데미의 추천으로 공중파 방송국의 막내작가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30명 남짓 되었던 동기들은 하나둘씩 취업이 돼서 아카데미를 떠나고, 9시부터 6시까지 차있던 수업도 점차 줄어들었다. 남겨진 동기들과 나는 취업을 기다리며 함께 영화를 보거나 카페에 둘러앉아 그전날 본 TV 프로그램을 이야기하며 빈 시간을 채웠갔다.


그러다 곧 12월 말일이 되었고 취업자를 제외한 동기들 몇명이 모여 다소 썰렁한 수료식에 참여했다. 사실 아카데미 수강 중에 취업 추천을 받지 못하면 다음 기수에 수강생들에게 밀려 취업 추천을 더 더욱 받기 힘들어진다. 뒤숭숭한 마음을 안고 참석한 수료식이 끝나고 우리는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조촐한 쫑파티를 했다. 다들 아쉬운 마음과 함께 취업에 대한 불안함을 토로하던 중 한 사람이 말했다.


"그래도 아카데미 다니면서 사람은 얻었잖아. 우리는 365만 원짜리 우정 이다야 하하하!! “

맞다, 아카데미 취업 추천을 받지 못했으니 내가 그렇게 비싼 등록금을 내고 얻은 건 정말 사람뿐이었다.


방송 아카데미는 언제, 어떻게, 왜 만들어졌을까?

다수의 청년들이 선망하는 직종, 하지만 공개 채용의 문은 좁은 현실.

그런 현실을 방송사에서 교묘하게 이용해서 만든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정 금액을 내고 여길 통과하면 너희들에게 방송 취업의 기회를 주겠어’ 이런 느낌으로 말이다.


사실 나는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아카데미를 다니는게 돈으로 취업 기회를 사는 느낌이 들었다.

한 명당 300만 원이 넘는 금액이니 실제로도 방송사 입장에서도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게 꽤 짭짤한 수익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취업을 하기 위해도 돈이 필요한 아이러니. 당시엔 거금의 돈을 내고도 취업기회를 잡지 못한 내 스스로가 바보 같고 무능력하게 느껴졌었다. 애초에 방송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방송 현장이 아닌 방송사 산하 아카데미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게 잘못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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