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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주치의 Apr 07. 2019

16. 아들이 나처럼 사는 건 싫습니다.

Epi.05 강박증, 강박장애, 우울, 불안, 두려움, 강박


Dr: “민혁 씨. 그냥 숫자 셋을 세지 말고 본인이 하고 싶은 행동을 바로 하면 안 되나요?”


민혁: “... 네. 저도 도전은 해봤어요. 평생 이렇게 살 수도 없는 문제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 너무 불안하고 하루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식은땀도 계속 나고요.”


Dr: "지금 저와 면담 중에도 본인이 대답하기 전에 하나, 둘, 셋 하고 세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민혁: "... 네. 선생님."


Dr: “그럼 어떤 생각이 들어서 그럴까요? 셋을 세지 않고 행동하면 어떤 생각이 들어서 불안해지는 걸까요?”


민혁: “...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 딱히 어떤 생각이 드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불안해져요. 이상한 건 아는데요. 이렇게 불안할 바에는 그냥 그 룰을 지키면서 사는 게 편하니까요.”


Dr: “그런데 아이가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나서 민혁 씨가 이 룰을 지키고 싶지 않아 진 거네요. 그렇죠?”


민혁: “... 네. 아들이 저처럼 사는 건 생각만 해도 괴롭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저는 강박에 저항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저처럼 사는 건 더 두렵습니다.

아들이 나처럼 사는 것은 두렵다.


민혁 씨에게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쇠사슬이 자신을 옥죄고 있는 듯한 이 고통을, 마치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이 괴로움을 아들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민혁 씨는 이미 아들의 강박적인 모습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덮어 씌우고 있었다.


Dr: “아이들은 영유아기에 일시적인 모방 행동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지럽히고 치우는 것을 그저 놀이처럼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합리적인 사고 과정이 이뤄지기에는 정신적인 발달이 이뤄지지 않은 시기니까요. 그저 아버지의 행위를 보며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선 아들이 자신과 같은 삶을 살 것이라고 괴로워하는 것은 충분한 평가를 받고 난 후에 해도 됩니다. 과도한 죄책감은 더욱 자신을 불안하게 하고 그 불안을 처리하기 위해 또 다른 강박을 보이게 될 겁니다. 아들은 아들대로 소아정신과 전문의 선생님께 필요한 평가를 받도록 하세요. 그리고 민혁 씨는 그와는 별개로 저와 함께 치료를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시겠죠?


민혁 씨는 그저 머리를 끄덕이고 있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Dr: “우선 민혁 씨는 우울, 불안 정도를 검사하고 성격 및 기질을 평가하는 TCI 검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TCI 검사는 Temperament and Character Inventory로써 미국 정신과 의사인 C. Robert Cloninger 교수에 의해 개발되었다. 이는 개인이 갖고 있는 기질 및 성격적인 특성을 평가하는 데 사용되는 검사도구로써 개인의 성격적 특징에 대해 설명하기에 유용한 검사도구이다. 나는 외래에 내원하는 이들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에 이 검사를 많이 사용한다. 몇몇 정신질환에 있어서 스트레스 사건에 취약한 개인의 기질 및 성격적 특성은 정신질환의 발병과 연관이 높은 요소이기 때문이다.


민혁 씨는 필요한 검사를 진행하기 위해 심리검사실로 가야 했다. 나는 진료실을 걸어 나가는 민혁 씨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보았다.


지금의 민혁 씨도 그때의 마리오네트 인형도...
내 눈에는 행복하지 않아 보였다.




약 40분 후, 민혁 씨는 모든 검사를 마쳤고 검사 결과지와 함께 다시 진료실로 들어왔다. 검사 결과에서도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Dr: “검사하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우선 기본적인 설문지 검사 결과로는 높은 정도의 우울, 불안을 이네요. 그리고 TCI 검사를 통해 민혁 씨의 타고난 기질 및 성격을 보면...


민혁: “... 네.


Dr: “우선 7가지 항목 중 자극 추구(NS: novelty seeking) 항목에서 매우 낮은 수치를 보입니다. 그리고 위험 회피(HA: harm avoidance) 항목은 매우 높은 정도를 보여요. 이는 새로운 환경이나 도전하는 상황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하며 위험에 대한 불안이 높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높은 보상 의존(RD: reward dependence) 성향, 낮은 자율성(SD: self-directedness) 및 연대감(C: cooperatieness) 성향을 보입니다. 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고 칭찬, 인정 등의 본인이 원하는 수준의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쉽게 우울하거나 불안할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합니다. 낮은 자율성 성향도 자신이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기보다 타인의 반응에 의존하는 성향이 높음을 의미합니다. 눈치도 많이 보게 되겠죠. 낮은 연대감은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는 보상에 의존하는 반면에 민혁 씨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타인과의 유대감은 낮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지만 자신은 그에 대한 결핍감을 느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검사 결과와 본인께서 생각하는 자신의 성격은 어느 정도 일치하나요?”


민혁: "... 네. 선생님. 평소 제 성격과 거의 일치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물건 배열하고 숫자 세고 이런 증상이 생긴 이후로 사람들 눈치를 더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회사를 일하러 가는 건지 눈치 보러 가는 건지 구분이 잘 안될 정도입니다. 하루 종일 눈치 보고 불안해하며 시달리다가 퇴근하는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수준입니다. 죽고 싶은 건 아니지만 많이 힘드네요. 아들까지 저처럼 될까 더 불안하고 괴롭습니다.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더 강박적이게 되고요. 사람들이 강박적인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불안하면서도 막상 그것들을 하지 않으면 더 불안해지니까 안 할 수도 없는 상태예요.”


민혁 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것은 이런 상황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적군에 의해 사면이 갇힌 채로 적의 진영에서 들려오는 구슬픈 초나라 노래를 들어야 했던 초나라의 패왕 항우처럼 민혁 씨의 현재 상또한 그 자신에게는 사면초가와 같았다. 결국 항우는 자결하고 말았지만 민혁 씨는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한다. 다행히도 민혁 씨는 자살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했다. 그는 절대 죽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고, 그렇다면 민혁 씨는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치료적 옵션이 많았다.


Dr: “민혁 씨는 자신의 일렬로 물건을 세우거나 셋까지 세고 행동 또는 말을 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막상 안 하면 이유 모를 불안 때문에 할 수밖에 없다는 거네요. 그런데 또 강박행동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불안해하고 말이죠. 아들이 자신을 닮을까 봐 불안하면서도 막상 강박행동을 하지 않으면 더 불안하니까 안 할 수가 없고요. 하고 나면 또 자괴감이 들고 그렇네요.”


민혁: “... 네. 안 하고 싶은데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저번 주에는 일을 마치고 책상 위에 펜들을 정리하지 않고 회사를 나섰다가 너무 불안해서 다시 회사로 돌아가서 평소처럼 펜을 일렬로 정리하고 집에 갔어요. 집에 가는 동안 불안하진 않았지만 자괴감이 들더군요. 내 인생인데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 같아요.


Dr: “내가 움직이고 싶지 않아도 내면에 어디선가 자신을 조종하는 것처럼 어떤 행위를 강박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거네요. 그 이유는 뭘까요?”


민혁: “... 이유를 모르겠어요. 선생님. 딱히 어떤 생각이 드는 건 아닌데 하루 내내 불안해요. 선생님.”


Dr: “대개 강박행동은 내면에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정신과적 증상입니다. 결국 민혁 씨 내면에 불안을 유발하는 사고, 즉 강박사고가 밝혀지고 해소되어야 불안이 사라지면서 강박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처음 해야 할 일은 내면에 불안을 유발하는 강박사고가 무엇인 지 알아보는 것입니다.”


민혁: “... 어떤 과정을 통해 알아보나요. 선생님.”


Dr: “우선 기본적인 면담을 통해 불안의 원인 되는 강박사고를 알아보고요. 만약 민혁 씨의 의식 수준에서 우리가 떠오르지 않는 다면 무의식에 대한 탐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은 오늘은 약물치료를 시작하고요. 1주일 후에 다시 외래에 내원해주셔서 면담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민혁 씨와의 첫 번째 면담은 항우울제와 소량의 항불안제를 1주일 치 처방하며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는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현한 후 진료실을 나갔다.




강박장애는 대개 치료가 어렵다. 그 이유는 내면에 자리 잡은 불안을 견뎌내며 고통받는 것보다 그저 강박행동을 해버리는 것이 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안에 저항하지 않고 계속해서 강박행동을 받아들이다 보면 마치 쇠사슬에 온 몸 전체가 감긴 것처럼 구속되어버린다.


민혁 씨 또한 그저 온몸에 쇠사슬이 감긴 채로 살았다. 그런 민혁 씨를 움직이게 한 것은 결국 아버지라는 이름이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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