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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페지오 Jul 15. 2023

간만의 호사

친구 덕분에 좋은 전시회에 다녀왔다. 가끔 전시회도 같이 가고 동네 나들이도 같이 하는 친구가 전시회 표를 한 장 주었다. 예약이 바로 다음 날이라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전시회를 보러 갔다.


큰 기대가 없었던 탓일까? 오랜만에 다시 찾은 국립중앙박물관은 외관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아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몇 번 왔었는데 왜 좋은 기억이 없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남자 아아들 대여섯 명을 챙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일 것 같다.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 주말마다 박물관, 전시회 등을 데리고 다니는 체험 학습이 유행이었다. 엄마, 아빠가 직접 데리고 가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대부분 가정은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등록하고 애들만 보냈다. 박물관에서는 체험 학습 선생님이 애들을 챙겨 주시지만 아이들을 박물관까지 데려다주고 중간중간 간식을 챙겨 줄 보호자가 필요했고 아이가 둘 혹은 셋인 엄마들은 주말에는 형제들도 챙겨야 했기에 내가 동네 아이들 체험 학습 도우미를 자청했다. 이것이 맞벌이하는 내가 엄마들 커뮤니티에 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나는 주말마다 동네 아이들을 이끌고 서울 곳곳의 박물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천방지축인 남자아이들 여러 명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항상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고 그래서 박물관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곳을 잊고 있었다니 감탄을 하면서 박물관에 들어섰고 입구에서부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친구가 예매해 준 전시회는 '영국 내셔날갤러리 명화전'이었는데 라파엘로, 티치아노, 고야, 터너, 마네, 모네, 르누아르, 고갱, 반 고흐 등 거장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회였다.


나는 미술은 잘 모르지만 미술관을 좋아한다. 여행을 가면 미술관을 꼭 방문하고 그곳에서 반나절 이상 시간을 보낸다. 회사를 다닐 때 사람들한테 치여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에도 반차를 내고 근처에 있는 미술관에 다녀오곤 했다. 은퇴한 후에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없어서인지 미술관을 찾지 않았는데 지인이 미술관을 좋아하던 나를 기억하고 표를 전해 준 것이다.


혼자라 다른 사람을 신경 쓸 필요도 없으니 오롯하게 전시회를 즐겼다. 예매한 시간에 입장을 해야 하지만 관람시간제한은 따로 없어서 여유 있게 전시회를 즐기고 나왔다. 오후 한 시가 훌쩍 넘었는데 그림을 보느라 허기도 느끼지 못했나 보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 박물관 카페에서 라테를 한잔 주문했다. 비 오는 날 박물관 풍경을 보면서 마시는 라테도 운치가 있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아이의 초등학교 시절 엄마들 커뮤니티에 끼려고 안간힘을 쓰던 내 모습이 기억났다. 그깟 커뮤니티가 뭐라고 주말마다 남의 아이들까지 데리고 다니는 수고를 떠맡았던 것인지. 어릴 때는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게 해 줄걸, 많이 보여주고 많이 체험하게 해 주고 싶다는 욕심에 박물관을 끌고 다녔던 초보 엄마의 모습도 안타까웠다. 좋다는 곳은 다 찾아서 열심히 데리고 다녔지만 어린 남자아이들은 전시회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그저 박물관 밖에서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고 싶어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이들을 타일러서 박물관으로 데리고 들어가던 내 모습이 생각나서 안쓰러웠다.

주말을 반납하고 동네 아이들을 끌고 다니는 무료(?) 봉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들 커뮤니티에 끼지 못했고 우리 아들은 주말마다 다녔던 박물관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그런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을 것 같다.  

커피를 마시면서 바라본 국립중앙박물관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에는 은퇴자들이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박물관, 미술관 같은 문화 시설이 잘 되어 있고 좋은 공연이나 전시회도 많이 열린다. 시에서 주최하는 무료 공연들도 많고 공연의 수준도 매우 높다. 이렇게 문화 인프라가 잘 갖추어진 나라에 살고 있다는 생각에 갑자기 뿌듯해졌다.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나라의 GDP 순위가 30위 정도 되었는데 이제는 10위 안에 든다고 한다. 순위로 보면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1인당 GDP가 57배 상승한 것이라고 하면 실감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급격히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본 세대라서 그런지 이렇게 뿌듯함을 느끼곤 한다.

 

은퇴 후 소망이 해외여행을 맘껏 다니는 것이었는데 요즘은 힘들게 외국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즐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회에서 본 그림 중에서 가장 좋았던 그림은 기를란다요의 '소녀'라는 그림이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도 좋았지만 내게 눈으로 말을 거는 듯한 소녀의 편안한 표정과 따스한 느낌이 좋았다. 영국에 출장을 갔을 때 주말에 짬을 내서 내셔날 갤러리에 갔었는데 이 그림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친구 덕분에 좋은 구경을 하고 오늘 하루도 알차게 보냈다. 은퇴의 필요조건 중 하나는 일상을 함께 할 친구라고 하던데 마음이 맞고 좋은 것을 함께 하고 싶은 친구들이 지천에 있으니 나는 남부럽지 않은 은퇴 부자이다.

기를란다요의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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