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무는 M사의 유일한 여성 상무였다. 그러나 고상무가 다니고 있는 외국계 기업에서는 상무라는 타이틀은 큰 의미가 없었다. 한국 타이틀은 그저 나이와 경륜에 따라서 붙여진 호칭일 뿐이었고 내부에서 통용되는 잡코드가 회사 내에서 개인의 위상을 결정했다.
연차가 이십 년을 훌쩍 넘은 고상무는 회사 내에서 상위 그룹에 속했지만 팀장이 아닌 Individual Contributor(IC)였다. 외국계 기업에서 IC란 팀원을 말한다. 즉 고상무는 부하직원 없이 혼자서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일반 직원이고 같은 팀에 있는 과장, 차장들과 똑같은 업무를 배정받았다.
고상무가 조금만 뻔뻔했다면 연장자에 대한 배려를 요구하고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같은 팀의 박상무는 나이를 앞세워서 자질구레한 일은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했다. 박상무가 쳐낸 자질구레한 업무들은 고스란히 젊은 직원들에게 떠넘겨졌다. 부서 내의 30대 직원들은 연장자 우대라는 관례 때문에 박상무가 떠넘긴 일들을 처리해야 했고 이것은 M사에서 행해지던 암묵적 관행이었다.
그러나 고상무는 이러한 이런 관행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타이틀에 연연하지 않고 다른 팀원들과 똑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수행했다. 고객사에 가서 소프트웨어 설치도 했고 기술 지원도 했다. 고객사에서 상무님이 이런 일까지 하냐고 물을 때마다 상처를 받곤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업무이니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사실 고상무도 주변의 시선에 신경이 쓰였다. 하루빨리 팀장으로 진급해서 연륜에 맞는 일을 하게 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매년 1년에 발표되는 진급 명단에는 그녀 이름이 없었다. 어떤 해에는 여자가 팀장이 되는 것이 껄끄럽다는 것이 이유였고 어떤 해에는 나이 많은 남자 직원들을 먼저 진급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다른 해에는 골프도 못 치고 술도 못 마시는 팀장은 필요 없다는 것이 탈락 사유였다. 이렇게 몇 년 동안 어처구니없는 이유들이 그녀 발목을 잡을 때마다 그녀는 회사와 일에 대한 열정을 잃어갔다.
지칠 대로 지치고 절망한 고상무는 어느덧 회사 생활울 겨우겨우 버티 내고 있었다. 항상 웃으며 다른 팀 일까지 솔선수범해서 도와주던 그녀가 언제부터인지 지원 요청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고상무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한 직원들은 고상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나이 많은 여자는 이래서 안 된다, 별 것도 아닌 일을 생색을 내고 튕긴다, 갱년기 스트레스를 회사에서 부린다는 등 고상무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선의로 남의 일을 도와주었던 것인데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고 화를 내니 고상무는 상처를 받았다. 동료들에게 대한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 고상무는 모든 지원 요청이 올 때마다 더 깐깐하게 굴었다.
어느덧 고상무에게 논쟁과 다툼은 일상이 되었다. 이제 고상무는 회사에서 같이 일하기 힘든 직원으로 분류되었고 회사에서는 외딴섬이 되었다. 고상무 또한 회사 내의 어떤 사람에게도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고 홀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상무는 더 이상 버티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결정하고 은퇴를 결심했다.
퇴사 날짜를 정하고 직장 생활을 찬찬히 되돌아보던 고상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가 모르던 낯선 사람이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나니 자신의 행동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녀는 다른 부서와 논쟁을 일삼았고 직원들에게 핀잔을 주거나 무안하게 해서 쓸데없는 지원 요청을 차단했다. 나이 많은 박상무가 꼰대 짓을 하는 짓을 보면서 욕하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녀도 박상무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고상무는 진작에 회사를 그만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렇게 괴물이 되기 전에 회사를 그만두었어야 했는데 정작 중요한 것이 무언인지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십 년 넘게 부끄럽지 않게 일했는데 마지막에 먹칠을 한 것 같아서 서글펐다.
정신을 차린 고상무는 같이 일했던 직원들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 자신의 문제에 갇혀서 주변을 살피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고상무의 진심 어린 사과에 직원들도 사과로 답했다. 매번 기꺼이 해주던 것을 갑자기 거절하니 배신감을 느껴서 그녀를 욕했다고 사과했다. 2년 내내 앙숙같이 싸우고 지내던 그들은 헤어지면서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화해를 했다.
은퇴를 하면서 깨달았다. 직장에서 버티기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 자신도 또라이가 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잘못된 관행이지만 당연하게 행해지는 이상한 짓들을 수없이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배워가고 있었다는 것을, 결국 또라이가 또라이를 만들고 회사는 또라이의 천국이 되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슬프지만 직장이라는 곳은 또라이의 천국이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또라이에게 휘말리지 않을 만큼 강력한 내면의 힘을 가지던지 내가 또라이가 되어야 한다. 슬픈 현실을 직면하면서 고상무는 은퇴하였다. 더 무서운 괴물이 되기 전에 탈출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상무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유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