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인이 술 한잔을 하자고 청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다음으로 미루고 싶었지만 꼭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약속을 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남편과의 갈등으로 힘겨워하고 있었다.
사실 부부 사이 문제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터놓고 말하기 힘들다. 내가 선택해서 결혼한 사람이니 남편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다를 바 없고 부부 사이의 문제는 상호적인 것이라 잘못은 내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의식한 탓인지 그녀도 매번 남편 이야기를 꺼내다 멈추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작정을 하고 나왔는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남편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녀와 그녀 남편은 직장 동료로 만나서 연애를 하고 결혼했다. 안정을 추구하는 남편은 첫 직장에서 이십 년 넘게 근무를 했고 도전을 즐기는 그녀는 회사를 여러 번 옮겼다. 세월이 흘러 결혼 이십 연차가 넘으면서 한 직장에 머물러 있던 남편과 그녀와의 연봉 차이는 훌쩍 벌어지게 되었다. 같은 직장을 다녔기에 남편의 주머니 사정을 빤히 알고 있는 그녀는 언젠가부터 생활비를 혼자 감당하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도 아닌데 마트에 가서도, 외식을 할 때도, 그리고 아이의 학원비까지 그녀가 지불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와이프가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 익숙해진 남편은 자신의 월급을 자유롭게 쓰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골프에 돈을 마음껏 썼고 친구들을 만나면 밥값, 술값도 턱턱 냈다. 외벌이라서 용돈을 받아 생활하는 친구들은 맞벌이 아내를 둔 그를 부러워했다. 친구들을 만나고 오면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만 집에 오자마자 그 마음은 사라지곤 했다. 술을 마신다고 화를 내고 골프채를 샀다고 타박을 하는 아내를 보면 가뜩이나 자격지심으로 꼬인 마음이 더 꼬였다. 아내의 절반밖에 안 되는 연봉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남편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아내의 태도에 발끈해서 모진 말을 해댔다. 그녀의 남편은 연애 시절 다정하고 세심했던 모습을 꽁꽁 가두고 불통 남편으로 변해갔다.
아내에 대한 자격지심이 쌓이고 남편에 대한 원망이 쌓여서 부부는 점점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 있어도 필요한 말만 주고받았다. 심지어 서로 같이 있는 것이 어색해서 집을 나서기도 했다. 휴일이면 남편은 아내를 피해 골프 연습장으로 향했고 아내는 아이의 학원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다 아이와 같이 집으로 들어왔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어느 날, 그들 사이의 균형이 깨지게 되었다. 갑자기 아내가 회사를 그만둔 것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생계를 책임지라고 통보했다. 이십 년 넘게 자유롭게 살던 남편은 준비할 시간도 없이 갑자기 가장 역할을 떠 넘기는 아내에게 화가 났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생활비에 놀란 남편은 모든 지출을 따져 물으며 아내의 씀씀이를 체크했다. 좋아하던 골프도 끊고 친구들과의 만남도 줄였지만 결국 마이너스 통장까지 만들어야 했다.
이십 년 넘게 누리던 자유를 박탈당해 화가 난 남편은 아내에게 분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대책도 없이 회사를 그만둔 그녀를 타박하며 능력 있는 여자인 줄 알고 결혼했는데 외모뿐 아니라 능력까지 형편없다는 막말을 해댔다. 집에서는 매일 고성이 오갔고 아이도 집에 들어오는 것을 꺼렸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과 위로를 해줬지만 해결책을 내어주지는 못했다. 그들 관계는 도무지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게 얽혀버린 실타래 같았다. 이렇게 엉망이 되기 전에 한올씩 풀어나갔어야 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대한민국 중년 부부의 현실이다.
회사를 다닐 때 딱히 할 일이 없어도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있는 남자 동료들을 많이 보았다. 사십 대 후반, 오십 대의 동료들은 집에 일찍 들어가면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자기가 등장하는 순간 즐겁게 웃고 있던 가족들의 표정이 굳어지고 적막이 감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동료들과 술을 먹고 거리를 배회하다가 가족들이 잠든 후에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가족을 위해 돈을 벌었고 돈을 벌기 위해서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없었던 것인데 어쩌다 보니 그들은 아는 건 별로 없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지인 부부의 케이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내는 출장을 가서 친구들 선물을 사 오면서 남편 선물은 사지 않았다. 뭘 사 와도 시큰둥한 남편의 선물은 사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매주 지인들과 골프를 치러 가면서 아내가 골프를 배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무관심과 오해가 쌓여서 부부이지만 아는 게 별로 없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어느덧 남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내의 취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고민해 보지만 답은 하나이다.
그들은 너무 오랜 세월을 남보다 못한 관계로 살아왔던 것이다.
지인을 만나고 난 후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라는 드라마가 떠올랐다. 주인공이 마치 우리 부모님 같기도 하고, 내 친구 같기도 하고, 나 같기도 해서 곱씹으면서 보았던 드라마인데 지인 부부의 현실과도 겹쳐있었다.
해피엔딩으로 끝난 드라마처럼 그들 부부도 켜켜이 쌓인 오해를 풀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기억상실증으로 스물두 살로 돌아간 주인공처럼 단 며칠만이라도 서로 사랑했던 시절로 돌아가서 상대방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 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가끔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다. 가족이니까 이해해 주겠지, 가족이니까 말을 안 해도 내 마음을 다 알겠지라는 생각은 정말 위험하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능력은 없다. 가족이니까 더 많이 대화를 해야 하고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글은 2022년 12월 19일에 발행된 "아는 건 별로 없지만 부부입니다."라는 글을 브런치북 용으로 수정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