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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딸

by 아르페지오

92년부터 93년까지 방송되었던 "아들과 딸"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깊게 퍼져있던 시대에 태어난 남녀 쌍둥이를 중심으로 가족 간의 갈등과 사랑, 가족의 의미에 대해 되새겨보는 내용의 드라마였다. 시청률이 60%에 육박했던 인기 드라마였지만 보다 보면 혈압이 올라서 매번 끝까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엄마 세대에게는 공감이 되는 내용이 많았는지 엄마는 꼬박꼬박 챙겨 보셨다.


30년도 지난 오래된 드라마이고 이제는 아들보다는 딸이 좋다는 시대가 되어서 요즘은 아들 하나만 있는 나를 불쌍하다고 한다. 그러나 딸로 살고 있고 아들만 있는 나는 여전히 아들이 더 좋은지 딸이 더 좋은지 잘 모르겠다.


몇 주전 시어머님을 모시고 시아버님 납골당에 가기로 했다. 납골당에 갔다가 근처에서 식사를 하면 좋을 것 같아서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결혼한 지 삼십 년이 다 되어가지만 어머님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는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시댁에 가면 항상 명절 음식이나 제사 음식만 먹었고 어머님은 항상 아버님 또는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주셔서 정작 어머님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남편에게 어머님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냐고 물었더니 자신 있게 평양냉면이라고 답했다. 납골당 바로 근처에 괜찮은 평양냉면 집이 있다는 남편 말을 믿고 A면옥을 예약했다.


아버님 기일날, 어머님을 모시고 납골당에 갔다가 예약해 놓은 A면옥으로 갔다. 그런데 웬만하면 음식을 남기지 않으시는 어머님께서 냉면을 반 이상 남기셨다. 몸이 안 좋으신 걸까 아니면 납골당에 다녀오셔서 마음이 안 좋으신 걸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평양냉면을 좋아하고 눈치도 없는 남편은 어머님이 남긴 그릇까지 싹 비우고 식당을 나왔다.


차를 타고 댁으로 가던 중에 어머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음식을 가리지 않는 편인데 평양냉면은 대체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음식을 남겨서 미안하다. 함흥냉면은 좋아하는데 평양냉면은 도저히 맛이 없어서 평소에도 먹지 않는다."


아뿔싸 남편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내가 바보였다. 오십이 한참 넘은 아들은 여태껏 자기 엄마가 무슨 냉면을 좋아하시는지 몰랐던 것이다. 함흥냉면을 좋아하시고 특히 비빔냉면을 좋아하시는 어머님께 평양냉면, 한술 더 떠서 평양 물냉면을 시켜드렸던 것이다.


다음부터는 꼭 메뉴를 여쭤보고 식당 예약을 하겠다고 했더니 평양냉면만 빼면 다 괜찮다고 하시면서 차에서 내리셨다. 둘째 아들이 평양냉면을 좋아해서 이전에도 평양냉면집에 데려간 적이 있다고 하시면서 너도 아들한테는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곤 호탕하게 웃으셨다. 그리고 딸이 둘이나 있고 딸과 함께 사는 사돈이 부럽다고 하시는데 그날따라 어머님의 뒷모습이 더 쓸쓸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딸이 둘이나 있는 우리 엄마는 행복하신지 생각해 보았다.


남아선호사항이 팽배하던 시절에 딸만 둘을 낳으신 우리 엄마는 시댁에서 꽤나 구박을 받으셨던 것 같다.. 그래도 딸 둘을 잘 키우셔서 둘 다 대학 졸업 후에 버젓한 대기업에 취직했으니 뿌듯하셨을 것이다. 두 딸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면서도 이십 년 넘게 대기업을 다녔으니 여기저기 딸 자랑도 하고 다니셨던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맏딸인 내가 엄마와 같이 산 지도 삼십 년이 다 되어 간다. 내가 엄마를 부양하다가 결혼했기 때문에 사위와는 거의 삼십 년째 같이 살고 계신다. 그런데 엄마는 가끔 아들이 있었으면 눈치 안 보고 마음 편하게 살았을 텐데라는 말씀을 하신다. 엄마의 그 말은 내 가슴을 후벼 파고 들어와서 생채기를 낸다.


우리 남편은 친정 엄마를 모시고 사는 것에 대해 불평 한마디 한 적 없는 착한 사위이다. 그리고 나도 결혼하고 여태까지 친정 엄마에게 드는 비용은 손 한번 벌리지 않았다. 직장을 다니는 25년 동안에는 혹시라도 엄마가 눈치를 보실까 봐 4인(친정 엄마, 남편과 아들, 그리고 나) 가족의 생활비도 전부 내가 부담했다. 이 정도면 아들 못지않게 자식 노릇을 한 것 아닐까? 몇 년 전에 은퇴한 후 생활비는 남편에게 받고 있지만 엄마 용돈이나 임플란트 같이 큰 비용이 드는 것들은 여전히 내가 충당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들이 없어서 눈치가 보인다니? 대체 무엇을 더 해야 내가 엄마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일까? 만약 내가 결혼을 안 하고 엄마를 모시고 살았더라면 엄마는 아들 없음을 한탄하지 않았을까?


엄마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아들이 셋이나 있는 시어머님과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은 꿰고 있지만 애교도 없고 살갑지 못한 딸이 둘이나 있는 친정 엄마, 두 분 중에 어떤 분이 더 행복하신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딸이 더 좋다는 말이 또 다른 선호사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지, 아들이건 딸이건 그저 같은 자식일 뿐인데 대체 왜 아들이 더 좋다, 딸이 더 좋다며 편을 가르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아들이 셋이나 있는 시어머니는 딸이 없는 내가 불쌍하다고 하시고 딸이 둘이나 있는 우리 엄마는 아들을 낳은 내가 부럽다고 하신다. 그 나이가 되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시어머님의 걱정에도, 엄마의 부러움에도 모두 맞장구를 쳐 드린다.


그러나 지금 나는 딸이 없어서 속상하지도 않고 아들이 있다고 특별히 더 든든하지도 않다.


아들과 딸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된 지 30년도 넘었지만 나는 여전히 드라마와 비슷한 상황과 마주한다. 어쩌면 남녀 차별은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지. 부디 우리 세대에는 이런 잘못된 관습이 사라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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