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위에는 유독 잘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유년시절을 강남에서 보냈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아버지는 평범한 회사원이셨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강남 8 학군 한복판에 터전을 마련하셨고 나는 그곳에서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15년 동안 살았다. 평범한 회사원의 월급으로 강남 부촌에서 사는 것은 버거우셨을 텐데 우리 부모님은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그 동네를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부모님은 우리를 위해 힘들게 버티셨을 테지만 슬프게도 나는 그곳에서 행복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풍족한 그곳에서 항상 결핍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춘기 무렵부터 친구들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내게 없다는 것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나만의 방이 없었다. 방이 두 개뿐인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항상 동생과 방을 같이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들 집에 가면 식구 수대로 방이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도우미 아줌마의 방까지 있었다. 당연히 우리 집에는 친구들 집에 두 세대씩 있는 자가용도 없었다. (90년대에는 자가용이 흔치 않았지만 이 동네에서는 자가용이 없는 가정이 드물었다.) 그리고 내게는 명품 옷이나 책가방도 없었다. 남대문 시장에서도 괜찮은 옷을 골라내는 눈썰미 좋은 엄마 덕분에 부자 친구들 속에서도 튀지 않고 지낼 수 있었지만 몇 번 입으면 해지는 싸구려 옷들이 정말 싫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친구들이 나를 따돌리거나 차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그들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 내게 없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어느덧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과 나는 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에 갔지만 그것이 강남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90년대에는 지금처럼 강남 밀집 현상이 심하지는 않아서 대학에 가보니 전국 여러 동네에서 온 친구들이 다양하게 섞여 있었다.
여하튼 넓은 세상으로 나가면서 초중고 친구들과는 자연스럽게 뿔뿔이 흩어졌다. 학창 시절에는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던 부의 차이가 대학에 가면서부터 엄청나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방학이면 친구들은 외국에 있는 별장에 가서 한두 달씩 지내다 들어왔다. 물론 나도 초대를 받았지만 응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다음번 방학 때 친구들을 초대할 별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1년 혹은 2년 휴학을 하고 미국이나 유럽으로 언어 연수를 떠나기도 했다. 말이 연수지 해외에 있는 부모님의 사업체에 가서 회사 업무를 미리 배우는 일종의 경영 승계 과정이었다. 이렇게 사는 세상이 다르고 생활 수준이 다르니 점점 친구들과 연락이 뜸해지게 되었고 소원해졌다.
세월이 흘러 흘러 친구들과 연락이 끊긴 지 어연 삼십 년이 넘었는데 신기하게도 그들의 소식이 가끔씩 전해진다. 연예인과 결혼한 친구의 소식은 TV에서 보고 도저히 마주칠 수 없는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 친구의 소식은 소셜에서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러나 가끔씩 보이는 화려한 친구들의 삶이 나는 이젠 부럽지 않다. 그곳이 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어린 시절에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은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알았다.
우연히 행복배틀이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내가 너무 잘 알고 익숙한 이야기라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부유한 동네에는 행복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드라마 주인공처럼 가면을 쓰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너무 어릴 때 그들의 민낯을 보았기에 나는 결혼한 후에 강남 입성은 꿈도 꾸지 않았다.
현실은 드라마와 별반 다르지 않다. 현실에서 얻은 소재로 드라마를 만들기 때문이다. 모든 불행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기 시작할 때부터 생기는 것이 아닐까.
나의 동창들은 대부분 강남에 산다. 나는 경기도에 살고 있지만 지금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기에 충분히 행복하다. 주변에서 강남에 입성하려고 아등바등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어떤 사람은 강남에 집 한 채 사는 것이 꿈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과연 그들이 강남에 집을 사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들이 몰랐던 세상을 알게 되어서 더 많은 것을 갈구하게 되지 않을까?
가끔 생각해 본다. 친구들과 비슷해지려고 기를 쓰고 노력해서 마침내 강남에 입성했더라면 나는 지금 행복했을까? 그랬더라면 아직도 잡히지 않는 무지개를 쫓고 있지 않을까? 15년의 강남 생활에서 내가 깨우친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행복은 배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