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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룹

by 아르페지오

슈룹은 순우리말로 우산을 뜻하는 말이다. "슈룹"이라는 드라마는 김혜수의 코믹 연기에 끌려서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곱씹어 볼 만한 메시지까지 담고 있어서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슈룹"의 배경은 조선시대이다. 다섯 명의 아들을 케어하느라 하루 종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중전을 보여주면서 드라마가 시작되는데 이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조선시대에 중전이 뛰어다니다니 대체 무슨 일일지 궁금해서 채널을 고정시키게 만들었다. 그런데 보다 보니 작금의 교육 사태를 꼬집은 풍자극임을 알게 되었고 드라마를 보는 내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날로 더 심해지는 사교육 열풍, 아이가 크면 대치동으로 몰려가는 사람들, 집중력 향상, 자기 주도 학습 등 말도 안 되는 학원까지 판을 치는 세상...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참담한 교육 현실에 절망하곤 했는데 이러한 이슈들을 꼬집어 주니 통쾌하고 시원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12년 동안 우리나라 교육 현장을 몸으로 체험했다.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 아이를 대학에 보냈던 몇 년 전보다 사교육 열풍은 더 심해졌다고 하니 정말 할 말이 없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처음에는 이성을 장착하고 육아를 시작한다. 그런데 아이가 커서 대입이라는 경쟁 구도 안에 들어가는 순간 하나둘씩 이성을 잃고 사교육의 횡포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문제는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사교육이 점점 더 일찍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의대를 보내려면 유치원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 있던데 제발 사실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드라마 "슈룹"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을 유쾌하게 풀어낸 사극이다. 조선시대의 왕실 교육도 지금의 영재 교육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태교부터 시작해서 쳬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커리큘럼, 예절, 정서, 음식 교육까지 조선 시대 영재 교육을 보면서 이러한 문제가 최근의 이슈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19세기말 독일에서는 기숙학교에서 발생하는 청소년 자살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고 하는 걸 보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닌 듯하다.


드라마 속 중전에게는 다섯 명의 아들이 있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궁에서 아이들을 보듬어주고 아이들의 우산(슈룹)이 되어주느라 하루 종일 뛰어다닌다. 왕실의 교육 시스템에 잘 적응해서 촉망받는 세자로 성장한 첫째, 지각을 밥먹듯이 하고 머리보다 몸을 잘 쓰는 반항아 둘째, 걱정이라곤 일도 없는 로맨티시스트 셋째, 성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는 넷째, 호기심이 많은 괴짜 막내까지 어쩌면 하나같이 그렇게 다른지 아들 하나 키우는 것도 힘들었는데 다섯이나 키우려면 정말 힘들겠다고 생각하면서 재밌게 보았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반성도 많이 했다. 참담한 교육 현장에서 아이를 지켜내려고 고군분투했지만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보낸 학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를 혼냈던 기억이 아직도 나를 괴롭힌다. 어릴 때는 뛰어놀아야 한다는 교육 철학을 지키면서 잘 키우고 있었는데 "평생 성적, 초등학교 4학년에 결정된다."라는 책이 유행을 하면서 덜컥 불안해졌다. 결국 남들처럼 학원을 등록하고 아이를 혼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학원을 보냈는데 나중에 학원 교재를 풀어보고서 알았다. 초등학교 4학년이 다녀서는 안 되는 곳에 내가 아이를 밀어 넣었다는 것을.


갈대처럼 흔들렸던 나와는 달리 대비마마에게도 반기를 들기도 하고 규율에도 맞서면서 아이들을 지켜내는 중전의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아이를 키울 때 이런 지인이나 선배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사교육과 공교육 틈에 끼어서 좌충우돌했던 시간을 돌아보면서 나는 왜 저렇게 중심을 잡지 못했던 건지 자아성찰도 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아이들은 맘껏 뛰어놀아야 한다. 적어도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오늘 누구하고 뭘 하고 놀지가 인생 최대의 고민이어야 한다. 이런 시간을 가지지 못한 채 성장한 아이들에게는 결핍이 생길 수밖에 없다. 대치동에 소아 정신과 간판이 유독 많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사교육 열풍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다면 드라마 "슈룹"을 볼 것을 추천한다. 이 드라마를 보고 나면 적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의 교육 철학을 지키면서 아이들은 키워나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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