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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Sep 30. 2022

당신을 향한 비움


살아가면서 우리는 더욱 견고해지고 또렷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규정 가능한 존재로 내가 거듭나는 것을 지켜보며 뿌듯해하지만, 그 속에 함정이 도사린다.


‘나’라는 존재가 규정되는 순간,
자아를 잃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존재의 규정된 위치나 의무가 아닌
이름으로 불리는 것의 황홀경을
수많은 시인들이 노래한 이유가
다 있는 거죠.


나 자신이 규정되는 순간, 규정될 수 없는 수많은 가능성의 나를 잃게 된다. 가능성이란 그늘 아래 불확실성의 역동을 경험하기 두려울 때, 우리는 이곳에 깃발을 꼽고 ‘나’라고, 외부의 모든 변화를 경계하게 된다.


“가능성을 잃은 순간부터는 지금 소유한 것들을 사수하기 위해 더 방어적인 태도로 살게 되니까, 그게 주는 안타까움이 있죠.”


“전에 에리히 프롬의 책에서 자아의 경계가 생기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글을 본 적이 있어요. 우리가 원하는 고정불변의 에고는 오히려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킨다고요.”


“어쩌면 유사한 맥락에서 불교가 귀의를 위해 비움을 실천하는 것도 내가 아닌 세상의 진리로 자신을 채우기 위한 준비 과정인 것 같아요.”


비움과 채움의 반복이 자아의 기본 이치가 된다. 자신을 고집할수록 세상을 채울 기회를 놓치고 홀로 멀어지게 된다. 특히나 마음을 내어줄 여유가 없다는 것은 사랑이 비집고 들어올 일말의 가능성마저 사그라지게 만든다.


“서른 즈음 되니까 호명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에 대한 환상이 흐려지고 있어요. 오히려 내가 누군가로 규정되는 순간에 대한 두려움이 거대한 그림자처럼 발목을 붙잡고 늘어져요. 되려 그 경계를 벗어나 사고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나를 옥죄는 울타리로부터 벗어나 멋대로 경계를 넓히고 싶달까.”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을 채우지 못하는 것은 내 가능성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싶다는 고집으로 나 자신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삶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홀로, 나만의 공간을 나로 채워 누군가 들어올 틈은 단 한 칸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타인에 대한 막연한 애정이 생겼다. 역시나 타인이 가진 본연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기대가 투영된 환상을 사랑한 것에 가까웠다. 실존할 수 없는 마음속 존재를 대하듯 잘못된 방식으로 애정을 표출하고, 그 결과 나조차 심연의 마음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렇게 또 닫으려던 마음을 끝내 다시 열어낸 것도, 고집을 꺾어준 것도 나 자신이 아니어서 발끝을 펴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웠어요.
어떠한 가능성에도 열려 있지 못한 마음은,
나로부터 뻗어나가는 가지에
열매맺히기라도 할까,
거둬들일  없는 결과를 향해
빛나기라도 할까 두려운 걸까요.


그러다가 문득 아직 만나지 못한 당신조차 놓치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만 해도 오늘이었을 가까운 과거에 마음을 두어, 내일만 되어도 오늘이 될 순간을 놓치고 싶진 않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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