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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샘 Jun 07. 2020

무거운 마음을 털어내고 싶을 때

너그럽고 너그럽던 선재길

 11월 3일, 평창은 추웠다. 톨게이트를 지나자 때 이르게 눈을 이고 있는 나무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내리면서 먼지도 가라앉았으면 좋았을 것을 핸드폰은 실시간으로 공기에 낙점을 주고 있었다. 빨간 숫자를 확인하니 목이 아팠다. 기도에서 기관지로 폐로, 먼지가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게다가 마뜩잖게 일정은  목장에서 월정사로 바뀌었다. 하얀 펜스를 따라 하염없이 걷고 싶었다. 구름과 맞닿아 있는 언덕까지 올라가면 숨이 좀 트일 것 같았다. 그런데 목장으로 가는 길이 정체라는 소식에  일행은 월정사로  발걸음을 돌렸다.


 월정사 초입에서는 무를 팔고 있었다. 바구니 가득 생김새가 고르지 않은 무가 들어 있었다. 시식용이었다. 식칼 세 개가  손에서 손으로 옮겨 다니며 부지런히 날을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일행이 정성껏 깎아서 내미는 무를 먹지 않았다. 미세 먼지 많은 날, 밖에  있었던 음식이었다.

 발 빠른 일행이 해설사를 모셔왔다. 염색하지 않은 하얀 머리카락을 여유롭게 땋은 오십을 전후해 보이는 분이셨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누빈 옷을 겹겹이 입고 합장하듯 작은 마이크를  들고 계셨다.

 "날씨가 많이 춥지요?"

 11월 초라 여겨지지 않는 추위였다.

 "어깨를 좀 더 펴시면 덜 추우실 겁니다."

 나도 따라 어깨를 펴보려 했지만 어깨의 면적은 마음을 따라가는지 자꾸 움츠려 들고 싶어 했다.


 해설은 절 안으로 들어가 석탑 앞에서 시작했다. 매일 보는 탑일 텐데 해설사의 표정은 빛나고 있었다. 그 덕에 나도 어디가  그렇게 곱고 귀한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하늘을 향해 차곡차곡 올라간 것은 돌덩어리답지 않게 정확한 각을 만들고 날렵하기까지 했다. 탑을 따라 올라가면 시선은 하늘에 닿았다. 그 날의 월정사 마당에서 본 하늘은 차갑고 탁했다. 내 마음이 그랬다.

 우리는 어느새 tv에서 보았던 전나무 길을 지나서 선재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전나무 길 위에는 속이 비고 쓰러진 나무가 거친 모습 그대로 누워있었다. 나무 그렇게 순환 앞에 기꺼이 비울 수 있었구나. 빽빽한 나무 숲을 생각했던 차에 뜻하지 않게 마주친 공백이었다. 나는 거침없이 비우는 법을 몰라 그들의 여운이 따가웠다. 그때 공기가 달라졌다.


 지금까지 추웠던 공기가 선재길 위에서 시원하게 바뀌었다. 물소리 덕이었다. 주위의 먼지도 다독여 바위 위로 내려앉게 한 듯했다. 덜 춥고 덜 무거웠다. 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선재길 위로 단풍잎 하나가 핑그르르 돌면서 떨어졌다. 발 밑으로 선명한 붉은 인장이 찍혔다. 방금 전까지  때늦은 단풍이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바람에 흔들려 색은 증발하고 바스러질 듯한 수분기 없는 잎사귀가 간신히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햇빛이 계곡물을 안고 뛰어올랐는지, 뛰어 오른 물이 공간을 닦아냈는지, 색 선명하게 바뀌어 있었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선재에게 깨달음을 찾아 길을 떠나라고 했단다. 선재가 만난 이들 중에는 스승이 아닌 이가 없었고 머무는 곳마다 배움이 없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선재길의 물소리도 깨달음을 얻었는지 속되지 않고 청신했다.

 "이 곳에 다 내려놓고 가셔도 됩니다. 저 물속에 다 던져놓고 가셔도 됩니다. 힘들었던 일, 어질러진 마음, 견디기 어렵던 모두를 여기 두고 가십시오."

해설사의 합장에 비로소 쉬어갈 마음이 생겼다.


 넓게 앉은 돌이 그래도 된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바위 사이로 흐르던 물이 기꺼이 받아주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내려놓고 던져놓은 먼지를 흘려보내 주러 그곳에서 기다렸다는 듯 크고 넉넉하게 웃어준다. 선재길은  흘보내기를 반복하며 '청신'을 배운 모양이다.

 나는 걱정과 눈물에 빠져 속이 시끄럽다고 귀를 막고 있었다. 단풍이 아직까지 가지를 잡고 있는 것도 못 마땅해했다. 오늘을  놓치면 일 년을 기다려야 하는 귀한  인연을 단풍잎처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잔뜩 미간을 모으고 미세먼지로 모든 것을 덮어놓고 탓했다.


 치유는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위로는 받아주는 마음에 뿌리하고 있다. 선재가 도처에 위로와 치유가 있다고 속삭이며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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