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가 할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는 '대습상속'
할아버지는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되기 전, 조심스럽게 나를 불러앉혔다. 6인실 병동의 커튼 가림막을 치고선 내게 매우 긴장한 모습으로 그리고 오래된 비밀을 말하려는 듯 자칫 할아버지는 비장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주고 싶다고 하셨다. 그리고 할머니를 지켜주고, 남은 여생을 함께해달라고 부탁했다. 할아버지에게 온전히 믿을 사람은 어리고 불완전한 20대의 나뿐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슬픔이 가실 새도 없이 행정적인 절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상속 문제가 가장 버거웠다. 나는 할아버지의 공식적인 상속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얼마 없는 전재산을 털어 변호사를 선임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할아버지와 형제들(삼촌 할아버지들)은 십여 년 전 돌아가신 증조할머니의 유산에 대한 정리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드라마에서 보듯 형제간 사이는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재산 문제 때문에 평생을 지겹도록 싸워댔기 때문이다. 내가 변호사를 선임한 것은 '법에 무지한 내가 만에 하나 정당한 할아버지의 몫을 빼앗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내린 결정이었다. 다들 형편이 여의치 않다 보니 당시 형제간의 갈등이 최고조였다. 할아버지의 의식이 흐려지면 흐려질수록, 앞으로 더 늙어질 할머니의 여생에 대한 나의 책임의 무게가 막중해졌다.
나는 그때 '대습상속'이라는 개념에 대해 알게 되었다. 대습상속은 추정 상속인의 사망으로 인해 그 직계비속이 재산을 상속하는 일을 의미하는데, 내 경우에 빗대어 보자면 쉽게 말해 조부모의 재산을 손자가 상속받는 일이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법률적인 절차가 필요했고, 많은 과정 중 가장 나를 괴롭게 했던 것은 사망인인 '할아버지의 10년 치 통장 내역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 평생에 걸쳐 할아버지가 무엇인가 비싼 물건을 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 작은 섬유 공장을 운영했었는데, 대외적으로는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이었지만 이 때도 우리가 부유했던 일은 내 기억으로는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낡은 다가구 주택에서 살았었고, 그곳은 90년대에나 볼 법한 옥색 싱크대, 오래된 노란 장판과 연한 꽃무늬 벽지가 덕지덕지 발려있는 공간이었다. 게다가 1층에는 식당이 있어 바퀴벌레도 심심치 않게 출몰하는 그저 그런 집.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을 내심 부러워하며 자랐던 사춘기 시절, 두 평 남짓한 내 방에서 나무 프레임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언제쯤 이 집을 떠날 수 있을까'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절을 겪은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할아버지의 10년 치 통장 내역을 살펴본다는 것은 내게 불안한 두근거림을 주었다. 통장 내역은 그 사람의 모든 행적을 낱낱이 보여주는 지표와 가깝다. 나는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눈으로 보며 짐작하는 것 외에 더 깊숙이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 있을까 불안했고, '할아버지의 삶이 너무 별로 였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렇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게 살았는데 경제적 보상이 전혀 없었다면. 나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의무에 따라 그 비밀 상자를 강제로 여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오래전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주민등록이 이미 말소된 상황에서 내가 할아버지의 친손자이며, 유일한 상속인이라는 것을 입증하려 두꺼운 서류를 뭉텅이로 가지고 은행을 돌았다. 행원분에게 내 사정을 설명하면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여러 군데 전화를 걸었다.
가까스로 받아낸 할아버지 계좌의 10년 치 내역을 보고 나는 기어이 눈물을 터뜨렸다. 지난 10년간, 할아버지의 소비는 너무나도 작고 간결했다. 한 번에 10만 원을 넘게 사용한 내역이 손에 꼽았다. 잔고도 얼마 없었다. 뭐 하나 좋은 것 해보지 못하고 덜컥 몹쓸 병에 걸려버린 것이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은 후회가 나를 괴롭혔다. 내가 조금만 더 나이 들었었다면, 내가 대기업에 취직했다면, 그것도 아님 내 아버지가 이렇게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가족 간 다툼이 마무리되고 할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했을 몫이 나에게로 왔다. N분의 1로 쪼개어져 여유롭진 않았으나, 알뜰하게 사용한다면 할머니의 남은 삶을 책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할머니가 아플 때 병원에 가지 못하는 일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했다. 서울의 어마 무시한 집값을 감당할 수는 없어 멀리 이사는 가야 했지만 할머니를 모실 깨끗하고 더 나은 컨디션의 거처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좀 더 건강하게 살아계셔서 낡은 집을 마지막으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과, 역설적으로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으로 할머니와 살아갈 밑천을 얻은 감사한 마음이 뒤엉켜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채로 한동안 지냈다. 있을 때 잘할 걸 하는 진부한 생각이 나를 붙잡고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