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으로 자란 나는 엄마랑 둘도 없는 베스트 프렌드다. 대화가 많은 편인데 가끔씩 새벽에 졸린 눈을 끔뻑거리면서 몇 시간을 떠든 적도 있다. 엄마와 내가 둘 다 흥미로워하는 주제가 있는가 하면 한 사람만 관심 있는 얘기를 할 땐 그저 듣고 있기도 하는데, 엄마의 새 이야기가 그랬다.
엄마는 언제부턴가 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진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호기심 같은 거 말이다. 지난 가을, 엄마는 출근길 회사 앞에 있던 감나무에 여러 종류의 새들이 모여 각자 수다스러운 소리를 내며 홍시를 먹는 걸 봤다고 했다. 얼마나 다양한 소리로 수다를 떠는지 엄마는 그 모습이 각자 자기 친구들을 불러 모아 같이 홍시 먹자고 얘기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며 나는 엄마가 뜬금없이 새에 관심을 보인다며 그저 흘려 들었다.
그 이후에도 엄마는 새 이야기를 종종 했다. 날아다니는 새들이 대체 어디서 뭘 먹고 사는지, 얘네가 집을 지을 때는 나뭇가지를 하나씩 물고 다니는데 얼마나 신기한지, 새들은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어디서 죽는지 모르겠다는 등의 이야기.
얼마 전, 엄마와 둘이 떠난 여행에서 드디어(?) 참새가 죽어있는 걸 처음 목격했다. 숙소 앞에는 마당이 있었는데 한편에 가만히 죽은 참새가 있었다. 엄마는 새가 살다가 자연적으로 죽을 땐 어디 가서 죽는 건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관심을 가지니 이렇게 어느 날 보게 되었다. 비둘기만 봐도 기겁을 하던 나도 괜히 이 생물이 조금 친근하게 느껴지고 있다.
오늘은 엄마 차에 타다가 새똥에 대한 철없는(?) 수다를 떨었다.
“새는 똥만 싸는 걸까?”
“그러게, 오줌 싸는 건 본 적이 없네.”
“새똥이 좀 묽은 편이잖아. 같이 나오는 건가 봐.”
“하긴, 새똥이 개똥처럼 더 크고 단단했다면 아팠겠다.”
새는 날아다니고 볼일을 보더라도 높이서 쌀 텐데 과연 딱딱했다면 어땠을까. 새똥을 맞은 사람도 동물도 다치고 아팠을 테고, 새똥을 맞은 차는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새똥을 맞아도 아프지 않은 이유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창조주의 깊은 사랑 덕분이지 않을까. 새똥이 묽어서 다행이다. 가벼운 대화를 농담처럼 하다가 또 하나의 감사를 발견한다. 앞으론 길 가다 새똥을 맞아도 묽어서 참 다행이라고 안도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