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시간에 쓰면 좋은 한자♡
회의 시간. 숨 막히는 시간들이 가끔 꿈에 나온다. 내가 잘 아는 얼굴들이 타원형 탁자에 삥 둘러있고 이번 실적이며 쿼터를 채워야 하는 목표와 회사 주력상품에 올인해야 한다는 내용을 기조로 말하면서 은근히 그 중간중간 누군가를 지목하고 깎아내리고 면박 주고 책상을 내려치고 윽박지르고 자존감을 벅벅 긁는다. 참다못해 꿈속에다가 외쳤다. 야 나 퇴사했잖아 왜 하필 회의시간이야!! 연극처럼 펼쳐지던 꿈들이 안개가 겹쳐진 듯 어두워지고 곧 밝아지면서 흩어졌다. 아침부터 무슨 징조로 이 꿈을 꾼 걸까 상념에 잠겼다가. 깊은숨을 내쉬며 이게 뭐라고 훌훌 턴다.
스트레스 가득했던 회의시간. 뱉어내는 자와 듣는 척하는 자가 있다. 머릿속으로 노래를 부른다는 직원도 있었고 점심 메뉴를 생각하는 직원도 있었다. 나는 주로 글씨를 썼다.
어질 현. 그때 제일 많이 쓴 한자일 것이다. 현명하게 이 순간을 넘기고 싶은데 속에선 울컥했다. 이 자식아 회의랑 폭언이랑 구분을 못하니 하며 욱하고 끓어오르는 마음을 내지르고 싶을 때마다 어질 현을 썼다. 쓰다 보면 동생 생각이 났다. 동생이름 중에 한 글자여서 더 친근하고 가까웠다. 그러다가 동생 생각으로 흐르며 잘 지내는지 걱정반 기도반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다가 풀 해를 썼다. 칼 도를 쓰고 싶은데 칼 도를 쓸 때마다 뭔가 섬뜩했다. 하나는 괜찮은데 칼이 2자루가 되고 3자루가 되고 모여있으니 이건 아닌 거 같았다. 그러다가 곰곰이 바라보니 칼이 제일 이쁘게 자리 잡은 한자가 풀 해인 것 같아서 그다음엔 풀 해를 썼다. 소를 잡아 뿔을 해체하는 것. 시간아 지나라 지나라 나는 늘 시간을 해결해야 했다.
그러다가 길어지면 혹은 밑도 끝도 없이 신변잡기와 면박주기를 이어갈 때는 하염없이 버들 류를 썼다. 버드나무 한그루 두 그루 세 그루 쓰다 보면 어릴 쩍 잠깐 살았던 잠실 석촌호수의 버드나무들이 생각났다. 잔잔한 호수가 옆으로 하늘하늘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가지가 생각나고 타임워프를 한 것처럼 잠시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나무 옆에 토끼 묘. 멀지 감치 떨어져 있는 나무 그 옆에서 토끼 한 마리. 제삼자가 되어 살랑거리는 바람에 춤추듯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본다. 어쩜 이런 심오한 글자가 내 성일까 감탄해 가며 열심히 썼다. 내가 만든 초서체를 보며 멋지다 감탄도 하면서 계속 열심히 공들여 쓴다. 애초에 바람소리만 존재했던 것처럼.
회의 없는 직장생활 2달째. 난 왜 이면지에 이 글자들을 하염없이 쓰고 있는 것일까?
10여 년 넘게 하던 하던 업무. 많은 업무량. 경력인정은 안 해주는 시급에 사원으로 2회 차에 뜨겁게 디어 나왔는데! 분명 더럽고 치사해서 거기 다시 안 돌아간다고 다짐했는데... 묘하게 헛헛한가 보다.
무경력에 처음 하는 업무. 적은 업무량. 어쨌든 시급인데 직급은 과장. 시간이 많아서 책도 읽고 브런치 글도 계획하고 쓰기도 하고 동료들도 다 좋은데.. 불리기만 하는 직급, 능력도 책임감도 애매한 역할이어서 그런 것일까?
오늘 최신가요 백선에 맞춰서 버들 류를 쓴다. 중간중간 어질 현과 풀 해를 쓴다. 선택은 내가 한 것이고 선택을 풀어가는 것 역시 나이다.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자.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자. 나무 한그루 그 옆에 귀 쫑긋한 토끼 한 마리 그리고 그 옆에 나. 그리고 매 순간 현명하게 풀어갔으면 어진 마음으로 바라봤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