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의미 Mar 23. 2024

나중에 효도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

앞에서 말했다시피 어릴적 나의 꿈은 엄마에게 예쁜 옷을 사주고 여행가고, 맛있는 밥을 사주는 거였다. 그러나 생각보다 병동 간호사 생활은 만만치 않았고 출근 길이 지옥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버텼나 모르게 지금 10여년째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이 안정되어 가고 있을 무렵, 아빠의 뇌경색이 재발했다. 두발로 걸어갔던 아빠인데 하루 아침에 혼수상태가 되었다. 의식도 없었고 말도 할 수 없었고 걸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하게 된 응급수술. 그러나 예후는 좋지 않다는 말. 하지만 수술하지 않으면 사망한다는 말. 수술 동의서를 작성하고 수술 경과에 대한 설명을 듣는데 이게 현실인지 실감나지 않는다고나 할까. 원인은 무엇이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생각했다. 만약, 1인실에서 내가 보호자 간병을 했다면 혹은 개인 간병사를 썼다면 그 낙상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




아빠랑 많이 놀러가지 못했는데, 맛있는 것도 많이 먹지 못했는데 기적처럼 영화에서처럼 단 한 번만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수술후 아빠는 바로 중환자실에 옮겨졌고, 중환자실 입실 동의서를 작성했다. 뇌압이 높아 뇌압을 떨어트리는 저체온 요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며 그래서 일부러 수면을 유도하는 약을 쓴다고 했다. 어떤 말을 하는지는 이해는 되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다시 아빠가 의식을 찾을 수 있을까? 내가 배운 의학적인 지식으로는 아빠가 일어나는 일이 굉장히 꿈같이 모호하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정신 없는 엄마를 챙기고, 친척들에게 연락을 돌려야 하는 것도 나였다. 그 때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고, 세입자들의 전세만기, 우리 이사로 정신 없는.. 경제적으로도 가장 힘들었을 때였다. 앞으로 아빠의 치료비가 얼마나 들지 몰랐고, 이 기약없는 치료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라는생각도 했었다. 문제는 치료비 자체에 대한 부담도 있었지만 언제 의식을 회복하고 좋아진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그 기약 없음에 있었다.



 

아무튼 현실은 그랬지만 우리집 곳곳에 남아있는 아빠의 흔적, 우리 아이들을 돌봐주셨던 흔적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엄마와 많이 울기도 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다. 아빠가 우리 병원에 있는 환자들처럼 휠체어를 타고 걸어다닐 정도만 되도 좋겠다고. 가족들의 정성과 여러 사람들의 기도 덕분이었는지 아빠는 기적처럼 회복했다. 복시가 있고 어지러움이 있지만 곧 중환자실을 나왔고 일반 병실에 나와 휠체어를 태워주면 탈 수 있는 정도는 됐다. 몸에 박혀있던 drain(배액관)을 L-tube(비위관)를 제외하고는 전부 제거했다. 자식들에게 부담주고 싶지 않다며 요양 병원도 작년 6월 마지막 코일색전술을 하고 퇴원하셨다. 우리는 그 때 아빠를 모시고 가족끼리 랍스타를 먹었는데 비용은 비쌌지만 아빠가 생각보다 너무 잘드셔서 뿌듯했다.(동생이랑 반반 부담해서 다행이었다) 현재는 보행도 조금씩 하며 복시와 어지러움은 있지만 지팡이를 잡고 조금씩 보행할 정도는 된다. 물론 긴 거리는 앉았다 쉬었다하며 걷는다고 했다.





그 이후, 환자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가족끼리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게 더 피부로 와닿았다. 예전에는 돈 많이 벌어서 엄마, 아빠랑 해외여행 가야지, 백화점에서 비싼 옷을 사줘야지 했다면 지금은 다소 현실적으로 효도 목록이 바뀌었다. 결국 부모님이 바라시는 것은 비싼 옷, 해외 여행이 아닌 자식과 함께하는시간,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거창하지 않아도, 가격이 비싸지 않아도 같이 시간될 때 맛있는 거 먹고, 가까운 서울부터 나들이 가고, 5성급 호텔이 어렵다는 3~4성급 호텔부터 같이 가면 되겠다 싶었다. 해외가 어렵다면 국내 저렴하고 가까운 곳을 가면 되는 터였다. 생각해보니 부모님께 밥을 차려준 적이 별로 없다는 점을 깨닫고 최근에는 엄마에게 파스타를 만들어드렸다. 이왕이면 맛있으면 좋겠지만 얼마나 맛있냐 맛없냐는 중요하지 않다. 엄마를 초대했다는 것. 부모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 하나면 충분하다. 물론 초대받은 부모님 또한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가끔 엄마와 영화를 보고, 서울 나들이도 가고, 호텔도 가고, 조금씩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돈과 시간이 크게 들지 않는 것부터 사소함을 채워갈 예정이다. 생각해보니 부모님이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날도 언제가 마지막이 될 지 모른다. 부모님이 걸을 수 있을 때 같이 시간을 보내자가 모토가 됐다. 바로 옆단지에 사는 부모님은 예전보다는 아이들을 봐주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아빠가 아프고 나서부터 우리는 아이 돌보미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으며 다행히 좋은 돌봄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어쩌다 내 근무가 갑자기 바뀐다거나 남편의 출장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부탁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아이들이 많이 크기도 했고, 내 새끼 돌보느라 부모님이 늙는 것도, 힘든 것도 싫다.





그래서 혹시 아직도 거창한 효도 드림을 꿈꾸는 분들이 계시다면 같이 차마시고, 밥먹고, 영화보고, 나들이 처럼 간략하게 효도 드림을 실천하시기를 바란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거고 부모님이 원하는 것은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 하나면 충분하다는 것을. 굳이 비싼 돈 들이지 않아도 자식만으로도 행복한 것이 부모라는 존재이지 않을까 싶다.






한줄평: 옆에 있을 때 잘하기요.



이전 03화 나는 빨리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