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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의미 Mar 13. 2024

엄마! 아빠랑 왜 OO 안해?

엄마 아빠는 병원에서 만났다고 했다. 삼촌이 맹장수술하느라 병원에 입원했는데 마침 아빠도 같은 병실에 입원했더라는 진부한 이야기. 그곳에서 부모님은 사랑을 꽃피웠고 결혼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어렸을 때 기억은 6~7살부터 단편적인 기억이 있다. 늘 퇴근길에 머리끝까지 만취해서 들어오는 아빠. 아빠는 부동산 관련 업종을 했는데 왕년에 잘 못나간 사람 없듯이 잘 나갈 때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빠가 샀던 건물이 팔리지 않자 엄마는 공실을 내버려둘 수 없었기에 내가 7살이 되던 해 1년 동안 가게를 했다. 어린 우리 두 남매를 데리고 다니면서 말이다. 그래서 우리동네에서 잘 다니던 미술학원을 그만둬야 했다. 가게 근처의 놀이방? 지금으로 말하면 어린이집 비슷한 곳에 다녔는데 9시에 가서 12시에 오는 일정이었다. 동생과 나는 그곳에 갔다 점심을 먹으러 엄마 가게에 왔다. 나는 이 시간을 기다렸는데 왜냐하면 가게 메뉴중 먹고 싶은 것을 엄마가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엄마에게는 그나마 오전 시간이 여유가 있는 시간이었다. 엄마는 밤 7시 ~ 8시까지 가게일을 하고 셔터문을 내렸다.





우리는 가게 옆 공터에서 놀기도 하고 가끔 졸리면 가게 의자에 누워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분명 엄마가 옆에 있었지만 엄마도 손님 맞이 및 음식을 하느라 우리와 놀아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그런 엄마의 고생 덕분인지 1년만에 건물을 팔 수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종합병원에 있는 식당에 취업을 했다. 퇴근 시간은 정확하게 기억안나지만 저녁시간에는 오셨던 것 같다. 아빠는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지만 계속 밖으로 돌아다니셨고 내가 3학년 되던 해, 엄마는 할머니의 농사를 돕기 위해 트럭을 샀다. 당시 일산에서 비닐 하우스 농사를 많이 지었었는데 할머니도 그렇게 농사를 지었다. 큰삼촌이 못하겠다고 하고, 이모도 힘들어서 못하겠다 했다고 한다. 그렇게 엄마는 할머니를 돕기 위해 어린 우리를 두고 매일 새벽같이 나가서 밤 8시에나 들어왔다. 그런 생활을 3년쯤 했을까. 비닐 하우스를 팔았는지 엄마는 또 다른 일을 찾았다.





보험 설계사, 도시가스 검침원, 홀 아르바이트 등등 안해본 일이 없을만큼. 그러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되던해 아빠는 여느 때처럼 술을 먹고 시비가 붙어 누군가와 다투었고, 고소를 당했다. 그 때 합의금이 50만원 정도 였는데 엄마가 힘들게 마련하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속으로 아빠가 정말 책임감이 없다. 밖으로 그렇게 돌아다녀도 밥벌이는 시원치 않음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마음이지만 노력하지 않는구나 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매일 같이 정장을 입고 어딘가로 가셨는데 엄마 말로는 부동산업에 종사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몇 년 동안 했음에도 수입이라는 결과가 없으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도 했었다. 아빠가 그렇게 밖으로 돌아다니는 시간 동안 고생하는 건 엄마와 우리들이었다. 더군다나 엄마가 모아둔 돈을 가져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 이해되지 않음과 한심함은 더욱더 증폭됐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너무 안됐고 불쌍했다. 엄마에게 대놓고 왜 아빠랑 이혼안하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 그럴때마다 엄마는 너희들이 있잖아. 아빠가 그래도 너희 밥이라도 차려주잖아 라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아빠가 그렇게 집에 자주 들어오는 편이 아니었기에 아빠의 밥상을 받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출장이라는 명목하에 초등학생 때는 집에 안들어오는 날이 절반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 날이 좋았다. 그래서 아빠처럼 술먹지 말아야지, 아빠처럼 살지 말아야지, 아빠 같은 남편 안 만나지가 내 인생의 목표였다. 나중에 꼭 내 밥벌이는 하는 사람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호강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생한 엄마의 시간을 보상해주고 싶었다. 왜 우리 아빠는 다른 집 아빠처럼 회사에 다니지 않는 걸까. 어린 내가 보기에도 한량 같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자기 인생을 비관하고 술로 인생을 낭비하는 느낌이었다. 당시 내가 바랬던 것은 다른 집 아빠처럼 큰 돈을 버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백만원이라도 벌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엄마가 저렇게까지 일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될텐데 라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방학 때마다 외할머니댁에 가있었다. 왜냐하면 엄마가 할머니와 어차피 일을 했으니까. 그리고 그당시에는 할머니가 돈을 많이 벌 때였다. 할머니가 번 돈으로 우리를 먹였고 입혔다. 지금 생각해봐도 할머니께 참 감사한 부분이다. 시간이 흘러 엄마는 현재 직종에 종사하게 되었고 지금은 10년이 넘게 한 업종에 종사중이다. 생각해보면 엄마가 우리를 키웠을 때 지금 내 나이보다도 어렸다. 내가 아이들을 낳아 키워보니 그 때 엄마가 참 고생했구나 힘들었구나 외로웠겠다 싶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아빠는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셔서였는지 내가 중학교 3학년때 뇌출혈이 발병했다. 병원에서 2달 정도 입원후 퇴원했다. 그 때 엄마가 했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이후로 아빠는 철이 드신 것 같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물론, 예전보다 도수가 낮고, 양 자체 종류 자체는 절제했으나 내가 보기에는 노답이었다. 그렇게 죽을뻔 했는데 또 술을 먹는다고?





더군다나 아빠가 아프고 나서는 집에 계셨기 때문에 더 부딪치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이렇게 말하기 그렇지만 아빠가 꼴보기 싫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고생시키고, 사랑하는 자식들을 고생시키는 아빠. 그러면서도 여전히 술을 못 끊는 아빠를 경멸했다. 엄마는 아빠가 아프면서 본격적으로 가장이 되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도 참 젊었는데 아픈 남편 뒷바라지와 자식 뒷바라지 하다가 어느덧 30년이 훌쩍 가버렸다. 내가 엄마 나이쯤 되어보니 그 때 엄마가 왜 아빠랑 이혼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엄마가 가정을 지켰기 때문에 그럼에도 우리가 잘 자라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도 남편 복은 없지만 자식 복은 있다고 말하는 엄마 말이다.






한줄평: 자식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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