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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의미 Mar 30. 2024

내가 친정과 거리두기 했던 이유

비교적 일찍 결혼했던터라 남편도 나도 넉넉하게 결혼한 편은 아니었다. 당시 2000만원 정도를 적금으로 갖고 있었고, 남편은 1000만원 정도 모았다 했다. 다행스럽게도 시부모님이 집을 갖고 계셔서 우리는 기존 세입자를 내보내는 보증금 명목만 드리면 그집에 들어가서 살 수(?) 있었다. 남편과 내가 모은 돈으로는 결혼식 비용, 신혼여행, 가전 가구를 사는데 썼다. 어디에 썼는지 모를만큼 순삭. 결혼할 때도 우리 집은 엄마의 외벌이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고 동생은 대학생이었다. 나나 동생이나 내돈내산 장학금 혹은 아르바이트 등등으로 학교를 다니고 직장생활을 했다. 결혼한다고 하니 부모님은 어떻게 할거냐 물어봤고, 내가 모은 돈과 시댁에서 집은 해결해주시니 되지 않을까 라고 말했다. 엄마는 돈이 없다고 했고 그래서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는데, 결혼하면서 해야하는 여러 일들, 스튜디오 메이크업 드레스와 폐백과 신혼여행, 예물 예단은 안한다고 했지만 어머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있었고, 결혼식 대관비, 한복 등등이 있었다.






나도 처음 결혼하는 것, 부모님도 처음 결혼시키는 것이어서 우리는 어떤 절차로 어떻게 해야할 지 잘 몰랐다. 그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과 상의해서 뚝닥뚝닥 하나씩 퀘스트 깨듯 해나갔다. 나는 그 과정에서 서운한 것이 있었다. 엄마 어머니가 한복 맞추재 하니 한복이 없는데 엄마는 어떡하지? 라고 했다. 잠깐 대여하던가 사서 입으면 되는데 엄마가 그렇게 말하는 뉘앙스는 그돈이 아깝다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말을 듣는 것 자체가 짜증났던 나는 우리 옷을 맞추면서 엄마 한복도 같이 샀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교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지만 엄마는 내가 말하지 않으면 정말 1원도 주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부모님이 적금을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딸이 결혼하는데 정말 아무것도 안해줄 생각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혼주 메이크업도 내가 냈으니 말 다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이건 조금 너무하다. 어떻게 딸 시집보내는데 아무것도 안해줄 수가 있냐해서 백만원 단위를 받아냈다.





그리고 더 서운했던 건 축의금 명단을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것. 그리고 그 축의금으로 친정 에어콘을 샀다고 말했다. 필요해서 사는 것은 좋은데 그걸 굳이 축의금 들어온 것에서 샀다고 들었을 때의 기분은 우리를 조금이라도 도와줄 마음은 없어 보인다는 점. 상대적으로 시부모님은 축의금을 우리 대출 갚는데 쓰라고 주셨기 때문에 더 대비되었다. 다는 못주더라도 이걸로 너희 소파라도 사라고 한다던가 엄마가 지금은 사정이 이래서 이 정도는 못해주지만 이건 해줄게 라고 말했다면 그 정도로 서운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엄마는 내가 고생해서 나를 키웠으니 내가 해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느끼는 뉘앙스랄까. 엄마의 속마음은 듣지 않아서 모르지만, 그당시 내가 느낀 느낌적인 느낌은 그러했다. 그 이후로도 밖에 나가서 밥을 먹을 때나 카페에 갈 때나 뭔가 돈을 내야하는 순간이 있을 때 엄마는 나는 안먹어 라고 말하고는 했다. 남편이 왜 장모님은 우리랑 먹을 때마다 계산 안하셔 라고 말해서 민망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 josuemichelphotography, 출처 Unsplash






그러다보니 엄마가 아이들을 봐주셨음에도 엄마랑 같이 밥을 먹는다거나 밖에 나가기가 싫어졌다. 엄마가 왜 그렇게 아끼는지는 이해가 되면서도 말이다. 아마도 엄마의 속마음은 노후 준비를 해야한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내가 지금 아끼고 돈을 모아놔야 자식들에게 손벌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지금은 엄마도 내가 언제까지 산다는 보장도 없고 돈은 아끼기는 해야하지만 쓸 때는 써야한다는 쪽으로 조금은 바뀌셨다. 그럼에도 내가 많이 사는 것은 안비밀. (ㅋㅋㅋ) 엄마의 관점이 바뀌게 된 계기는 아무래도 아빠의 뇌경색 재발병이 컸다. 이것을 계기도 엄마나 동생 나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음을 깨닫게 되았고, 서로에 대한 애틋함과 소중함을 느끼고 있다.






엄마가 가끔은 희망 보증 수표를 발행하는데 얼마전에는 너희 집에 소파를 두면 참 좋을 것 같다며 사준다고 이야기해서 엄마가 갑자기 철들었나 싶었다. 주변에 자녀를 결혼시키는 동료가 있었는데 엄마한테 어떻게 결혼시켰냐며 시댁에 뭘 해줬는지 꼬치꼬치 물어봤던 모양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엄마는 느낀 바가 많았고, 내가 뚝닥뚝닥 스스로 알아서 했음을 깨달았던 모양이었다. 엄마는 딸이 다 알아서 해서 내가 특별히 신경쓸 게 없었고 해준게 없었다. 라고 대답해 지인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또 가끔은 지난날에 대한 후회를 언급해서 당황하게 하고는 한다. 동생과 내가 어렸을때 돈 아낀다고 너무 안 좋은 집에 살게 한 것 같다고, 집을 살려면 대출 받아서 살 수 있었는데 라고 말했다. 지금 집은 아빠는 시장이 멀어 불편하다고 하는 반면, 그에 반해 엄마의 주거 만족도는 최상이었다. (엄마는 우리 단지 옆단지에 살고 계신다)







우리가 좋은 집에 살고 있어서 부모로서 기특하고 대견하다고. 요즘은 결혼시키기도 쉽지 않고. 집사기도 쉽지 않다며. 너는 이제 걱정이 안된다고 했다. 나중에 엄마 아빠 죽으면 이 집 팔아서 둘이 나눠가지라는 말도. 그래서 지극히 티적인 관점으로 주택 연금 받아서 그걸로 엄마 아빠 노후 하면 딱이겠다고 했다. 지금은 적당한 거리두기는 하고 있지만 엄마 아빠가 언제 돌아가실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적당히 왕래하며 지낸다. 예전에는 연락하지 않고 우리집에 들이닥쳤다면 요즘은 전화해서 내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물어보신다. (엄마한테 대놓고 연락좀 하고 오라고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자주 보는 우리 부모님에 대한 정서적 친밀함이 있다. 서로 적당히 왕래하고 선은 지키면서 지내고 있는 중.






한줄평: 엄마 아빠가 언제까지 살아계실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려고 한다. 너무 무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무관심하지도 않다는. 같이 시간 맞으면 밥먹고, 잠깐 카페도 갈 수 있고, 영화도 볼 수 있는 그런 사이 말이다. 친정과의 멀어졌던 거리를 그렇게 보폭을 맞춰가며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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