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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의미 Apr 18. 2024

세번째 스무살, 20년만의 운전연수

엄마는 우리가 어렸을 때 삼촌(막내)에게서 중고차를 받았다. 삼촌이 쓰던 차를 줬는데 그 이름도 자부심 가득한 프라이드 였다. 검정색 프라이드, 빨간 티코와 대조적이었던 차로 기억한다. 아무튼 우리는 그 차를 타고 우리가 사는 경기도에서 외가가 있는 잠실까지 왔다갔다 잘 다녔다. 목동 오목교 부근에서인가 길을 잃어 엄마가 뱅글뱅글 돌다가 평소보다 늦게 집에오는 날도 있을 정도. 아빠는 그 차를 똥차라고 부르면서 차도 작고 불편하다며 잘 타지 않으려고 했지만 엄마가 우리 두 남매를 태우고 다니기에는 충분했다. 프라이드는 삼촌이 타던 차여서 그랬는지 잔고장이 종종 있었고 엄마는 배터리를 교체한다던가 타이어를 간다던가 차의 소모적인 부분들을 수리하러 카센터에 갔었다. 그 때만 해도 블루핸즈나 이런 서비스센터가 많지 않았기에 카센터에 가서 교체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차를 타고 다니면서 우리는 외가에 가거나 멀리 갈 때 종종 탔다. 엄마는 동네에서는 운전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주차도 어설퍼서 부딪치기도 하고 긁히기도 몇 번 했다. 결국 프라이드는 3년 정도 타다 폐차해야 했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카센터에서도 이 아이의 생명은 다했노라 하고 사망선고를 내린 직후였다. 그렇게 프라이드를 폐차했고 내가 3학년이 되던 해, 엄마는 새차를 장만했다. 포터 트럭을 샀는데 할머니의 농사를 돕기 위해서였다. 당시만 해도 트럭은 3인승 밖에 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앞에 누가 타기라도 하면 앞 좌석 뒷부분 짐을 놓는 공간에 쭈그리고 탔다. 그럼에도 우리 남매가 다 타고 다녔으니... 그 시절 우리는 참 작았구나 싶다. 그렇지만 엉덩이가 엔진인지 차 밑의 부품 바로 밑에 있어서 아팠던 건 안 비밀이다. 이 포터 트럭은 엄마와 할머니의 농사에 치명적인 도움을 주었는데 가락시장에 가서 갓, 배추, 농작물을 싣어서 팔았으며, 농사짓는 일꾼들을 싣기도 했다.






그렇게 3년 정도 탔을까. 엄마는 새벽 5시부터 일산으로 출근해서 일꾼들을 싣고 밤 8시가 되어서야 경기도 집에 오는 강행군을 했다. 아마 그 시절 동트기전 출근해서 해지고서야 들어오는 엄마가 가장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당연히 우리 공부나 식사며 신경쓸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엄마 나이쯤 들어 생각해보니 이제는 엄마가 정말 힘들었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아이들 둘을 키우며 출퇴근 한 것만으로도 대단하신거라고. 그런 힘든 생활 속에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교육 시키고 키우려고 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포터는 3년간 열일하다 농사를 승계 하기로 한 큰삼촌에게 반 값으로 팔리게 된다. 결국 그 포터는 어떻게 되었을까? 몇 달 되지 않았을 무렵, 삼촌은 농사도 안짓겠다고 하고 여자친구를 사귀더니... 트럭을 팔아버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당시 나도 어렸지만 삼촌도 참 철이 없구나 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시간이 흘러 그 이후로 우리집은 차없이 잘 살았었다.








그리고 지금 엄마 나이만큼 들어 나는 어느새 운전 6년차, 답답한 차를 보며 클락션을 울리기도 하고, 노매너 주차, 주행하는 차들에게는 혀를 차기도 하는 정도가 되었다. 그랬던 어느 날, 동생이 차를 샀는데, 출퇴근을 대중교통으로 하다보니 차가 집에서 쉬고 있다고 했다(?) 엄마는 동생의 그 차를 데리고 놀게 해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동생은 바쁘고, 바쁘지 않더라도 엄마의 도로주행까지 봐줄 실력 정도는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동생보다는 딸에게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동생차로 엄마 운전 연수를 해주기로 했는데 마땅히 연수할 만한데가 동네에 없던 거. 그래서 옆동네 공원 주차장으로 갔다. 엄마는 당장은 도로주행은 못하겠다고 했다. 옆동네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운전수를 교체했다.





엄마에게 브레이크, 엑셀, 기어 변속부터 알려주었다. 깜박이 키는 것과 주차할 때 주차 표시등도 포함해서.

엄마는 처음 배운 아기처럼 어버버했다. 왕년에 트럭 몰고 다닌 이여사가 맞는지, 나이 들어 하려니 더 힘들다는 말도 했다. 그래서 야심차게 세운 도로주행 계획과는 달리, 주차장에서만 빙글빙글 도는 운전연수가 이어졌다. 갑자기 주차하는 차가 나타나면 엄마는 멘붕이 됐고, 나는 부딪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급정거만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엄마는 갑자기 차가 나타나면 내가 봤을 때는 부딪치지 않고 매끄럽게 지나갈 수 있는 구간도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래서 사람이 오는지 보고 차가 오는지 보고 대처하면 된다고 알려드렸다. 양손에 운전대는 잡지만 덜덜 거리면서 운전했다. 그렇게 짧은 구간을 반복하다보니 가르치는 이도 재미가 없었고, 심각한 건 엄마뿐이었다. 1시간 정도 연습하니 코너링이 조금더 부드러워졌고, 처음보다는 엄마도 자신감을 갖는 듯 했다.





집에 오는 길에는 운전수를 바꿔서 내가 운전하고 주유소에 가서 기름까지 넣고 왔다. 더 길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 날 시댁에서 남편과 아이들이 오는 날이었다. 아무튼 예전에는 엄마 차에 탔었는데 이제는 내가 엄마를 모셔가고, 운전을 가르쳐주다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엄마가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운전에 익숙해지길 바래본다.






한줄평: 엄마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양화대교 노래가 떠오르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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