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는 아빠를 참 좋아했다고 한다. 나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우리 아들이 지금 나를 졸졸 쫓아다니는 것을 보면 아 저랬겠구나 라는 것이 짐작이 된다. 아들은 내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도 문을 확 열고 들어와서 물까지 내려주는 엄마 사랑이 대단한 녀석이다. 사실 이건 들은 이야기인데, 아빠도 나와 같은 일을 겪었다고 한다. 아빠가 볼일을 보러 가면 내가 아빠한테 매달려서 화장실까지 침범했다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말도 안돼 싶을 그런 이야기. 아빠는 7남매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러나 할머니가 늙어서 낳은 아이라 그런 것에 대한 슬픔이랄까. 그늘이 있는 사람이었다. 연로한 부모님에게 제대로 케어받을 수가 없었고 그 부족한 부분을 누나들(나에게는 고모들)이 채워주었다. 그래서인지 사랑할 줄도 아는 사람. 나와 동생을 정말 사랑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부모님 직업을 묻는 가정환경 조사서(?)와 같은 양식에 아빠 직업을 물을 때면 뭐라고 써야할지 몰랐다. 그럴때마다 아빠에게 물어보면 건축업이라고 하라고 했기에 그렇게 적었을 뿐. 하지만 아빠가 실제로 건축업을 하는지는 미지수였다. 그때도 왠지 눈치로 그쪽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직장생활을 하지 않고 비교적 자유로운 프리랜서였기 때문에 우리집은 고정적인 수입이 없었다. 돈을 벌면 벌긴 하는데 과연 얼마나 벌었는지 지금도 미지수. 덕분에 엄마는 일하러 나가야 했다. 그말은 곧 어린 우리 남매에게, 엄마가 필요할 나이. 부모님의 자리가 부재했다는 점이다. 아 물론 저녁 때는 들어오셨다. 그러나 가끔 엄마가 너무 일이 많을 때거나, 아빠가 출장에 갈때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때가 많았다. 그래봤자 아침은 잘 먹지 않아 상관없었고, 점심은 학교에서 급식이 나왔다. 문제는 저녁이었다.
부모님은 2000원에서 3000원 정도를 두고 가셨고, 그 돈으로 동생과 나눠서 라면을 사거나 계란을 몇개씩 사고는 했다. 당시 내 기억으로 계란을 낱개씩도 팔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고도 돈이 남으면 과자나 군것질 거리를 사기는 했다. 하지만 거의 돈은 남지 않았다. 아무튼 문제는 내가 점점 성장하면서 아빠에 대한 원망이 자라났다는 것이다. 그당시만 해도 전업주부로 집에 있는 엄마들이 많았다. 왜 우리집에는 학교에 갔다오면, 학원에 갔다오면 엄마가 없는걸까? 라는 의문에서부터 시작됐다. 물론 엄마 없이도 씩씩하게 잘 지내기는 했지만 집에 오면 아무도 없다는 공허함과 외로움은.. 아빠 때문에 엄마가 고생해 라는 생각. 실제로 아빠는 그당시 집에 잘 들어오지 않고 계속 출장의 연속이었다. 정말 출장이었는지, 친구들과 놀러갔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신용카드 회사에서 전화도 많이 받았다. 카드가 연체됐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엄마 피셜, 엄마가 어렵게 모은 1000만원(지금 물가면 더 비쌀듯 하다.)을 아빠가 사업자금 명목으로 가져갔다는 이야기. 그 때 1000만원이면 조금더 보태어 단독주택도 살 수 있던 가격이었다고 한다.
나는 밤에 아빠가 엄마한테 돈을 달라고 하는 모습, 엄마는 안된다고 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두분은 그 일로 가끔 다퉜다. 나는 안그래도 힘든데, 그 돈이면 우리 학원비며, 급식비를 밀리지 않고 낼수 있는데 아빠라는 사람은 엄마나 동생, 그리고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그런 남편을 만난 덕분에(?) 여러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이 직업, 저 직업 바꿔가며 일했다. 그러다 잘 다니던 병원 식당을 그만두고 할머니와 함께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게 되었는데 이 때가 가장 힘들었다. 2~3년 정도 지었는데 농사일이라는 게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트럭을 몰고 다녔는데 새벽부터 나가 밤8시나 되어서야 들어왔다. 엄마는 다리가 아프다. 온몸이 아프다고 했고 씻고 눈만 잠깐 붙이다 또 새벽부터 나갔다. 나는 그런 엄마가 인간으로서 불쌍했다. 엄마가 일하다가 아플까봐. 저렇게 일하다가 엄마가 과로사로 죽어버릴까봐 불안했다. 그래서 엄마가 다리를 주물러달라고 하면 다리를 주물러줬다.
그런데다가 아빠는 매일 술을 사오거나 혹은 밖에서 먹고 와서도 또 먹었다. 얼마나 먹었는지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소리. 그러면서도 본인의 안주를 차리는 모습 등 그냥 그 자체가 꼴보기 싫었다. 물건을 던진다거나 그렇지는 않았지만 술먹고 와서 우리를 건드린다거나 엄마를 건드린다거나 해서 갈등이 일어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도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는데 일이 잘 안됐다거나 그랬던 것 같다. 그치만 어린 나이에 아빠의 이런 외로움까지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엄마도 엄마 나름대로 짜증났을 것 같다. 내 남편이 아빠같은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그 술냄새가 풍겨올 때 너무 역겨웠다. 아니. 뭘 잘했다고 술을 마셔. 그 정신 있으면 밖에서 돈을 벌어와야지 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빠를 존경할 수 없었고 미워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힘든 건 아빠가 아빠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라고. 그리고 이걸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아닌건 아니라고 말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아빠한테 대든다고 많이 맞았다. 그럴 때마다 왜 내가 맞아야 하지? 성인이 되면 집을 나가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와중에도 그러려면 내가 공부를 해야하며 반듯한 직장에 들어가야 가능하겠구나 라는 계산이 됐다. 아빠가 차라리 우리곁에 없으면 엄마나 동생, 내가 덜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한줄평: 그래서 그 아이는 어떻게 자랐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