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사람이 태어나서 80년을 넘게 산다는 것은 꿈같고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평균나이 80년을 넘게 사는 세상이 되었다. 매년 3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다고 한다. 다양한 나이의 사망자가 있지만 그중에 80세 이상의 고령자가 다수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사망자가 많아졌다고 한다. 2020년 사망자가 출생자보다 많아 인구가 자연감소하는 ‘인구 데드크로스’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60세 이상의 인구는 증가하고 있다는 말은 그만큼 사람들이 오래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가 우리 몸과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도 길어야 20년이다. “ 요즘 친구들과 대화 속에 이런 얘기들이 나온다. 그런 것 같다. 대체로 수명이 길어졌다고는 하나 80년 넘게 사는 어른들이 누구의 도움 없이 온전한 정신과 몸으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병장수라는 말은 꿈같은 얘기고 그야말로 병을 갖고 오래 사는 유병장수의 시대라고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동안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하고 크게 애도해 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 것은 내 기억의 오류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많은 일가친척도 시나브로 한 분씩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헤아려 보았다. 내가 아는 죽음 중에 유난히 충격으로 남아있는 기억이 있어 더듬어 보았다.
- 충격적인 기억
아주 어릴 적 국민(초등) 학교 1-2학년 무렵이었나. 뭔 일인지 모른 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곳을 따라간 적이 있었다. 시내에 살던 우리는 그리 멀지 않은 바닷가에 버려진 아주 작은 인형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이상한 회색빛 물체 같은 것을 보았다. 어른들의 이야기로는 갓 태어난 아기였고 그것이 동물의 그것과도 비슷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너무 이상해서 무서웠고 겁이 많았던 나는 사소한 것에도 더욱더 잘 놀라는 아이가 되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의미로 정의되지 않았으며 그때의 충격은 트라우마로 남아 성장시기에도 자주 가위에 눌리곤 하였다. 가끔 방송의 비슷한 뉴스는 바로 그때의 기억으로 오버랩되었다.
- 어릴 적 친구를 잃은 슬픔
내가 국민(초등) 학교 4학년 2학기 때 한 아이가 전학을 왔다. 아니 전학이 아니라 병원생활을 오래 하다가 퇴원하고 다시 학교에 돌아온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원래 그 아이는 한 학년 선배였다. 선생님은 내 옆에다 앉게 하셨다. 그 아이는 야위고 핏기 하나 없는 하얀 얼굴이었다. 예쁜 원피스를 입고 그 당시에는 아무도 갖고 있지 않던 일제 필통에 연필 깎기로 깎은 연필이 나란히 줄을 지어 있었다.
그 친구네는 중앙시장에서 쌀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아빠는 무역선 선장이었다고 기억한다. 우리 집과 멀지 않은 그 친구네 쌀가게 2층이 살림집이었는데 가끔씩 숙제도 하고 같이 놀았다. 겨우 몇 개월의 우정을 쌓을 정도로 짧은 기간이었고, 그 친구는 결석이 잦았으며 어느 날부터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2학기를 채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선생님이 알려주셨다. 그 당시 나의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뿐이었다. 한 동안 나는 그 아이를 생각했다. 나는 그 아이가 깎아서 내게 준 연필하나를 쓰지 않고 오랫동안 간직하기만 하였다.
- 나의 젊은 친구 이야기
그는 미국유학을 한 재원이었고 무역중개를 하고 있었다. 맛있는 커피와 그림과 음악을 좋아했고 젠틀하고 스윗하여 우리는 그를 좋아하였다. 그는 거래하고 있는 브라질에서는 한국의 날 행사에 맞춰 작품전시회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봤듯이 내일도 볼 것처럼 해놓고 며칠간 연락이 없었다. 바쁜 일이 있겠거니 하고 기다린 우리에게 온 것은 그의 비보였다. 갑자기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다고 한다. 아무런 낌새도 없이 우리 곁을 떠나갔다. 약간의 지병을 갖고 복약 중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우울증이라는 것은 사후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 놀라서 멍할 따름이었다. 나는 가까운 이의 죽음에 대해 크게 느끼지 못한 채 살고 있었는 데, 매일 같이 보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고 생각하니 믿기지가 않았다. 한동안 우리는 애도의 마음으로 몹시 우울했다.
- 먼저 떠난 나의 벗
내 친구는 말을 할 때면 눈에서 별이 반짝반짝하다가 이내 별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꿈을 꾸는 듯했고 그녀가 말을 하고 있으면 온 세상은 핑크빛, 보랏빛, 노란 꽃잎들이 내려와 우리 주위를 감싸는 듯싶었다. 북극을 이야기할 때는 내 눈앞에 오로라가 펼쳐지고 나이아가라 폭포수의 표현하기 힘든 웅장한 물소리와 불보라에 눈을 감아야 했다. 그랜드캐년에서의 광활함은 태곳적 신비를 간직하여 보지 않아도 보였다. 샌프란시스코를 얘기할 때면 나는 'I Left My Heart In Sanfrancisco'를 불렀다. 뉴욕의 타임 스퀘어에서 누군가를 만난 이야기를 하면 나는 자유의 여신상을 상상하고 브루클린 다리가 나오면 나는 '부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라는 영화를 생각하였다.
하와이를 떠올리며 한쪽 구석에서 먼지 뒤집어쓰고 있는 우쿠렐레를 꺼내 들고 잘 알지도 못하는 훌라춤을 추며 난리부루스를 쳤다. 한참을 그러고는 우리는 배를 잡고 떼구루루 구르며 한참을 웃다가 목이 마르면 와인잔을 부딪혔다. 잠이 많은 나는 그녀의 꿈같은 이야기 속에 빠져 며칠 밤을 새운 뒷날은 닭병에 걸려 꾸벅꾸벅 졸기도 하였다. 그녀의 생생토크는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돌고 그녀는 별똥별 같은 이야기만 남기고 떠나갔다. 그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MoMA 미술관을 가기로 했는데....... 가끔은 눈물 먹은 미소로 너를 추억할 수 있게 해 줘서 '정말 고마워'라며 그녀가 남긴 터키석 목걸이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나의 기억에 있는 슬프고 아픈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죽음과 이별이었다. 아무리 평균수명이 길어졌다고 하나 우리 주변에 이런저런 질병이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가족이든 가까운 이의 죽음을 한 번도 겪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무탈하게 산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아무 일 없이 살아온 듯 보이는 사람도 예전에 사고나 질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기적 같은 얘기를 듣기도 하였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얼마나 빨리 처치를 했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경우도 많았다.
병원에 가보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거기에 있는 것처럼 어찌 그리 아픈 이들이 많은지, 멀쩡한 사람도 아프게 느껴지는 곳이다. 살면서 아프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몸과 마음, 내적이든 외적이든 고통 없이 아프지 않고 사는 완전한 삶은 없다. 많은 이들이 몸이든 마음이든 불편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곳과는 또 다른 세계에는 어른들의 전쟁으로 내몰리는 젊은이들과 그중에서도 여자들, 아이들 같은 약자들은 전쟁이나 사고로 병으로 내일이라는 오늘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슬픈 일들이 가득한 세상이다.
가끔 우리 삶이 하루살이와 다를 바 없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 같다’ 가도 어쩔 땐 ‘쇠심줄처럼 질기다’는 말도 있다. 오롯이 무탈하게 오늘은 살아내는 것은 어쩌면 기적 같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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