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을 위한 특별한 기준
오랜 지인인 A선생님의 부인이 의식소실상태에서 100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깊은 애도와 명복을 빌었다. 선생님의 가족들은 희망고문을 포기하고 환자를 더 이상 고통이 없는 편안한 곳으로 보내드리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고혈압으로 쓰러진 부인은 대학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수술도 잘되었다고 하였다. 뇌지주막하 출혈은 고혈압이 원인이었고 예후가 좋지 않다는 병이지만 수술결과가 좋아서 모두가 기대를 하였다. 하루빨리 깨어나기를 바라는 가족들은 간절한 희망과 불안, 초조로 하루하루를 그네 뛰는 심정이었다.
A선생님은 부인에 대한 자책과 상심으로 가족이나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부부는 그동안 자신들의 삶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가족여행과 취미로 인생후반을 계획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의 기원 속에서 다행히 눈을 뜨는 등 호전반응을 보여 일반병실로 옮긴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상태가 좋지 않아 중환자실로 가서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졌다. 환자도 무의식 속에서도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의사의 말에 가족들은 한 가닥 희망을 붙들고 있었다.
일주일이 한 달이 되고 두 달, 세 달, 백일이 되었다. 의사는 환자가 벼랑 끝에 서있다고 하였다. 다행히 깨어나도 온전한 상태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의사도 생명을 살리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가족들은 참아내었다.
환자가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으로 숨을 쉬고 잠을 자듯 그렇게 사는 것이 진정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를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였다. 모두가 슬프고 아프지만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일이 어찌 쉬운 결정이었겠는가.
요즘 시대에 칠순은 너무 젊고 아름다운 아줌마였다. 누구에게도 다정다감하며 환한 미소로 자기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온 부인, 엄마, 자매로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하기로 했다. 그들을 아는 모두가 슬퍼했다.
우리 삶의 모습이 다양한 것처럼 죽음의 모습 또한 천차만별이다. 불현듯이든 아니든 죽음을 맞게 되면 본인이나 가까운 이들도 매우 당황하고 깊은 상심에 빠진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것대로 시한부 같은 죽음 또한 살아있는 이들 앞에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은 마찬가지다.
서울대학병원 종양내과 김범석교수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 병원에서 암환자들과 죽음을 대하는 다양한 모습을 봤다. 예정된 죽음 앞에 놓인 환자와 가족의 모습 중에서 눈길이 가는 상반되는 두 죽음을 보았다.
너무나 평범한 한 할머니는 느닷없이 찾아온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남은 삶도 평소처럼 차분하게 살아냈다. 죽음은 당연히 두렵고 정든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은 아플 것이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평범함 속에서 행복을 발견한 분이었다. 그 어떤 사람보다도 보통 사람이지만 특별했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었다.
상반되는 이야기는 너무 충격적이어서 저자의 글을 간추려 보았다.
또 다른 한 할머니는 할머니의 사 남매의 자녀들이 의사에게 최선을 다해 달라는 신신당부 속에 의사들은 최선을 다했다.
할머니는 결국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아무리 센 항생제를 써도 폐렴이 좋아지지 않았고 그렇다고 빨리 돌아가지도 않았다. 혈압이 떨어질 것 같으면 혈압 올리는 약을 썼고, 산소 수치가 떨어지면 인공호습기의 산소를 올렸다. 콩팥 기능이 나빠지기 시작하자 투석도 시작했다.
그렇게 1주 2주 3주가 흘렀다. 수액 주사가 많이 들어가니 할머니의 얼굴은 퉁퉁 부어서 눈을 억지로 뜨게 해도 떠지지 않았다. 피검사를 하도 해대서 혈관들은 다 터졌고 팔다리에는 검푸른 멍 자국이 가득했다. 그 와중에도 각종 수액과 항생제, 승압제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할머니 몸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엉덩이에는 욕창이 생기기 시작했고 승압제를 오래 쓴 탓에 손가락, 발가락 끝은 검게 썩기 시작했다.
혈압이 떨어지거나 산소 수치가 떨어져서 각종 기계들이 삑삑거리며 시끄럽게 울리면 표정 없는 간호사들이 와서 약을 올리고 알람을 끄고 가버렸다. 콧줄로 들어간 식사가 대변으로 나오면 간호사들이 화서 환자를 번쩍 들어 기저귀를 갈고 대변을 닦아냈다.
퉁퉁 부어서 알아보기 힘들어진 환자의 얼굴로 할머니는 그렇게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한 달여를 버텼다. 최선을 다해 달라는 가족들은 끝내 ‘심폐소생술 거부 동의서’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버티고 버티던 할머니의 심장은 이제는 좀 쉬고 싶다며 어느 날 갑자기 멈춰버렸다.
“선생님, 어레스트예요!”
다들 할머니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가족들이 ‘심폐소생술 거부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료진은 CPR(심폐소생술)을 해야만 했고, 기계적으로 몰려온 사람들이 CPR을 시작했다. 인턴 선생님이 흉부 압박을 시작하자 뚝 소리가 나며 할머니의 복장뼈가 푹 꺼졌다.
“150줄 차지 해주세요. 모두 떨어지세요!”
펑!
제세동기라 불리는 전기충격기가 환자의 몸에 가해지자 펑 소리와 함께 환자의 늙고 작은 체구가 들썩였다.
“아직 안 돌아왔네요. 200줄 차지!”
펑!
노구가 다시 한번 허공에 떠올랐다.
“인턴 선생님, 계속 컴프레선요.”
흉부를 압박할 때마다 뚝뚝 소리가 났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더 부러질 갈비뼈가 없어지자 이제는 부러진 갈비뼈가 서로 맞닿아 뼈 갈리는 소리가 신경을 거슬렀다.
보호자가 오면 주치의는 나가서 보호자와 가족들에게 상황을 설명할 것이다. 가족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환자의 죽음을 받아들이면 주치의는 사망을 선언할 수 있다. 환자의 저승 가는 길은 그렇게 힘들고 험난했다.
가족들과 의료진은 환자에게 현대의학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고 환자는 너무 힘들게 저승길로 떠났다.
나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자꾸 되묻게 되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하고.‘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견디기 힘든 심한 통증이 시작되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중환자실의 할머니도 자신의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들고 있음을, 고통을 더하는 진료가 부질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식들은 효도라는 이름으로 환자 본인의 의사를 무시한 채 또 다른 불효를 행한 것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자녀들은 그동안 하지 못한 효도를 마지막으로 한 것이라 자위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든 순간을 선택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죽음은 의지로 되지 않는다. 어쩌면 죽음의 의지도 선택의 한 부분인지 모르겠다. 어떤 선택이 떠나는 사람과 남은 사람을 위한 것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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