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무게
저녁을 먹은 것이 체한 건지 뭐가 단단히 탈이 났는지 토하고 난리가 났다.
맥주까지 한잔 했던 탓인지 머리도 깨질 듯이 아팠다. 혈압은 150이 넘고 얼굴엔 빨간 주근깨 같은 붉은 반점이 가득했다. 새벽까지 토하고 나서 거울을 보니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나는 지난밤에 일어난 통증만으로도 너무 힘들었다.
변기를 붙들고 구토를 하는 동안 (물론 죽을 만큼은 아니어도) 피가 얼굴로 쏠리고 고막이 터질 듯하고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는 고통도 나에게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 속의 암환자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죽음과 마주하는 고통 속에 있었다.
죽음처럼 무섭고 두렵고 힘들고 아플 것이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는 둔감하고 또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타인의 심장에 대못이 박히는 고통보다 자신의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프다는 말이 있다.
고통의 당사자가 되지 않고서는 객관적으로 통증을 알기 힘든 것이다.
다른 사람이 겪는 그 고통은 나는 감히 짐작하지 못한다.
하지만 고통이 클 것이라는 어림짐작만 할 뿐이다.
며칠 전 자궁 내막암으로 치료 중인 지인이 전화가 왔다. 신랑과 함께 친정 가는 길인데 나와 점심을 먹고 가고 싶다고 했다. 친정은 우리 집과는 반대쪽인데도 신랑이 굳이 나와 같이 점심 먹고 차를 마시고 싶어 한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활기찼다. 몇 개월 전에도 바람 쐰다고 다녀갔다.
그녀는 얼굴이 하얀 예쁜 얼굴에 풍성한 머리가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항암약의 부작용으로 피부색은 가무잡잡하게 변했고 순간순간 기력이 꺾이고 힘든 순간을 견디고 있었다. 다행히 빠졌던 머리는 묶을 정도로 제법 길었고 여전히 빼어난 패션 감각은 숨길 수가 없다.
요즘은 다리의 임파선이 많이 부어 걷기가 힘들어 아로마 오일 마사지를 한다고 하였다.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가 너무 아파서 움직여지질 않는다고 하였다.
몸이 아픈 걸 다 표현하지 않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견뎌내는 동생이 늘 사랑스럽고 대견하여 코끝이 시큰해진다. 자주 연락을 하고 싶어도 힘들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스러운 마음에 아주 가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인사를 건넨다. 그렇게 여러 달에 한 번을 만나도 우리는 웃고 떠들며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고 수다로 피로를 풀었다.
내 친구도 8년 전에 유방암이 발병하여 치료와 요양을 잘하여 지금까지 무탈하게 직장생활까지 잘하고 있다.
병원의 정기검진을 1년에 한 번씩 하고 있으며 검진 결과가 무탈하다고 해서 너무나 다행이다. 그럼에도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기 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한다.
또 몇 년 전부터 최근까지 암으로 간 친구들이 있고 간혹 지인들의 부음을 들으면 정말 우리는 언젠가는 떠나는 존재들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버지께서 작년 무덥던 여름날을 힘겹게 견디시다가 선선한 가을이 되자 돌아가셨다.
통증으로 무척 고통 속에 힘겨워하실 때는 보는 우리들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해한다고는 하지만 그 고통을 본인이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다.
사람마다 통증을 느끼는 강도가 다르다고 한다.
어머니에 비해 아버지는 통증에 민감하고 통감도 많이 느끼는 편이셨다. 보통사람들에 비해 참을성이 없다고
예전에는 엄마가 놀리셨는데 그런 아버지가 많이 아파하실 땐 보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슬프고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는 통증이 심할 때는 두 시간 간격으로 약을 복용해도 진통 효과가 전혀 없다고 하셨다.
심한 통증을 느낄 때는 빨리 죽고 싶다고도 하셨다. 어떻게 하면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릴까를 고민에 고민을 했다. 진통제로 인한 부작용도 걱정이 되었지만 진통제를 써도 통증이 가라앉지를 않아서 약과 패치를 병용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힘들어하실 때 고통이나 덜게 진통제를 충분히 썼다면 아픈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
조금 낫지 않았을까 하는 때늦은 후회가 되었다.
우리나라 어르신들은 진통제 쓰는 것을 많이 꺼려하신다.
혹시 진통제 부작용으로 약발이 받지 않을까 아니면 수술 시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라고 한다. 병으로 인한 통증으로 고통을 겪다가 결국엔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다. 아픔에 신음하다 세상을 떠나는 것은 환자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지켜보는 이들도 가슴 아픈 일이다. 그 고통을 완화시키고 좀 더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TV에서 스위스의 안락사 조력 단체 엑시트(Exit)라는 곳을 본 적이 있다. 불치병이나 암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혹은 참을 수 없는 정신질환의 병을 겪고 있는 이들이 고통을 줄이고 편안하게
인생을 마감할 수 있게 도와주는 단체다.
엑시트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불치병이나 말기암 판정을 받은 시한부에 한해서라는 조건이 있었다.
스위스는 1940년대부터 의사 등의 도움을 받아 생을 마감하는 '수동적' 조력자살을 허용하고 있다.
스위스 인구 100명 중 한 명이 엑시트 회원이라고 한다.
이 국가에서는 안락사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생을 마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많은 나라에서는 종교 등 이유에서 안락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자살이다. 안락사와 자살은 자의적인 결정이지만 결과는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안락사는 의사나 의료기관에서 인정한 것이고 일반적인 자살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자살은 안락사보다 주변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자살을 선택하는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과 제대로 된 이별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다. 또한 가족들은 자살을 방조한 죄책감을 평생 갖고 가거나 오랜 시간 동안 트라우마를 겪는 경우도 많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인 것이다.
이 죽음의 형태를 옳다 그르다 단정하여 말할 수는 없다.
그동안 살아온 삶의 형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듯이 이제는 우리의 생을 마감할 때 꼭 고통을 수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내다가 저녁 만찬을 즐기고 잠을 자는 동안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러면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고 무서운 일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세상사 힘들다 고통스럽다 하여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식의 선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일이다. 예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수복강녕(壽福康寜)이라 하여 복 중에 수명을 제 일로 쳤다. 이 세상에 보잘것없는 생명은 없는 것처럼 생명은 누구에게나 귀중한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고통의 무게를 줄이고 좀 더 인간적이고 편안하게 세상과 이별하는
선택지가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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