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m Feb 04. 2024

10화. 부모와의 관계가 쉽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10화>

부모와의 관계가 쉽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태어나서 본능적으로 택하는 것부터 우리는 돌잡이의 큰 산을 건너, 어떤 친구와 쌍둥이처럼 붙어 다닐지 정하기 시작한다. 인생이 흘러갈수록, 세월이 쌓일수록, 우리는 나의 선택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치열하게 배우고 만다. 그럼에도 오늘의 식사부터 잠드는 시간까지 우리가 사사로이, 혹은 고민을 거듭해 결국 내리는 결정이란 지독하게 계속된다. 어느 정도의 성장을 지나면서부터는 선택의 결과를 지켜보고 어떤 결론이 날지라도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 쉽지도, 공평하지도, 일률적이지도 않다.


개중에 우리가 결정할 수 없음에도 죽는 그날까지 모든 부담을 져야 하는 다소 공격적인 부분이 있다. 바로 부모 형제와 유전으로 이루어진 나의 재능 혹은 약점 말이다. 자식에게 부모란 태어나 세상이 낯설어 울다 보니 만나게 되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양육방식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 같지 않다고 다시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일방적인지, 이것이 불합리하다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는 이미 훌쩍 커버린 상태이니 누구도 탓할 수 없다.


가수 이소라의 7집 앨범 중에 ‘Track 9’번에 이러한 가사가 있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렸네 걷고 말하고 배우고 난 후로 난 좀 변했고 나대로 가고 멈추고 풀었네”


Track 9라는 다소 건조한 제목의 노래가 지금도 꾸준히 사랑받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태어나 살아가는 일방적인 상태, 덧없음을 완벽히 표현한 덕이지 않을까 싶다.


부모가 아이에게 거칠거나 차갑게 대하거나 어떤 때는 방임하여도 사람들은 ‘운이 안 좋은 아이’라며 개입하기에 꺼려 한다. 혀를 차고 그만이다. 어느 누구도 쉽게 아이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반면, 아이가 부모에게 불합리함과 고통을 언성 높여 호소하면 이름부터 지독한 ‘패륜아’가 되고 만다. 만인의 적, 모든 인권이 말살되고 이유 불문, 부모는 세상에서 가장 가엾은 사람이 되고 만다.

‘패륜’을 저지르는 기준은 각자 다르겠지만, 보통 부모가 ‘대노’하여 화를 식히기 어려운 단계에 다다르거나 자녀 측에서 절연을 선언하면 기준에 합당하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여러 면에서 나는 명확히 ‘패륜’을 저질렀다. 부모의 많은 선택에 증오를 느끼고 충분히 아이였던 나를 보호할 수 있었음에도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환경에 자주 노출시켰다. 어금니를 악물고 버텨내 봤지만, 버티고, 힘든 내 감정을 참아낸 결과는 ‘마음의 병’으로 돌아왔다. 버텨낸 긴 시간만큼 병의 깊이 또한 가늠할 수 없게 깊었다. 내가 더 이상 참는 것을 되도록 하지 않기로 작정했을 때, 동시에 부모님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되도록 새벽 귀가를 하곤 했다. 그게 내가 선택한 최선으로 갈등을 피하는 방법이었다. 새벽에 겨우 돌아와 방에 가 앉으면 이게 정말 ‘나의 방’이 맞나 싶었다. 아무 때나 돌아와 가장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결코.




새벽에야 몰래 들어와 고양이 세수와. 양치를 하고 구석에 파묻히는 것. 생각보다 오래 버텼지만 결국 나는 피곤에 절어져 종종 오후 9-10시 사이에 귀가를 하곤 했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는 나를 가만 둘리 없었고 반쯤의 잔소리와 반쯤의 핀잔을 섞어 화와 짜증을 내곤 했다.

참지 않기로 결심한 어느 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를 마주 보고, 그러니까 두 눈을 바라보고 고함을 질렀다. 고함 이후 여전히 큰 목소리로 평소에 참아왔던 이야기 중에서 일부를 꺼냈다. 내가 꽁꽁 잠가둔 진심의 이야기들은 결국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나에게 공황발작이 왔다. 발작으로 괴로워하며 우는 나를 두고, 엄마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 잠에 들었다. 아주 긴- 밤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비어 있는 엄마의 방을 보며 짐을 챙겨 집을 나왔다. 절연을 마음먹었다. 그것이 나의 ‘패륜 이야기’의 축약본이다.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든 언젠가는 부모를 평가하게 된다. 그것이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다. 마음을 다하여 존중하며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환경에 서는 큰 문제가 없다. 세상을 살아가며 부모님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인생의 목표라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어느 만큼의 질투와 가득한 부러움 때문에 늘 혼자 몸부림쳤다. 우리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었듯이, 부모에 대한 평가도 어느 만큼은 정해서 주어진 것 아닌가 싶다. 부모의 삶의 태도는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어려운 이들, 더하여 부모에게 도저히 정이 가지 않는 어떤 사람들에게 넌지시 말을 걸어본다. 어린이 일 때 많이 힘들지 않았는지…. 부모가 온 세상의 전부이고 우주일 때의 마음의 갈등. 그럴 때는 내가 나를 아주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부모와 힘든 많은 사람들이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힘든 경우가 많은 듯하다. 그리하여 건방지게도 이 한 가지를 권한다. 세상 그 누구보다 나를 잘 관찰할 것.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곳이 편하고, 무엇에 관심 있는지에 대하여 거듭하여 생각하기. 내가 부모, 형제, 친구에게 기울이던 관심을 나에게로 옮겨와 나를 많이 아껴주기. 이 간단하면서도 정작 매우 어려운 변화를 강하게 권한다.


당신은 누구에게든, 혹은 스스로에게도 더 많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지금껏 혼자 앓고 있는 상처에 사과받을 권리도 있다. 드라마틱 하게 표현하자면 어떤 ‘운명’이나 ‘인연’ 건조하게 표현하자면 ‘확률’의 문제로 만난 부모와의 관계가 당신을 다치게 했다면, 당신이 그 갈등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 당신의 나약함 때문은 아니다. 부모에 대한 충성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문화 중에 잘 버텨왔다. ‘죽겠다’ 싶으면 절연도, 가출도 불가피하다. 당신은 스스로를 살려내야만 한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용기는 무겁고, 변화는 끔찍이 두렵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당신을 훨씬 나은 곳으로 이끌 것이다. 언제가 될지라도 ‘혹독한 인연’을 깨쳐 나갈 당신을 응원한다.




2024년 2월

심경선 드림

이전 10화 9화. 봄을 기다리는 당신을 위하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