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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 Jan 21. 2024

8화. 갈 길이 먼 당신을 위하여

차를 한 잔 마신다. 매일 쓴 커피만 약처럼 마시다 아주 오랜만에 정성을 들여 차를 마신다. 버튼 한 번이면 꽤 괜찮은 커피를 내놓는 전자동 머신이 준비되어 있는 환경에서 차분히 서서 차 도구들을 예열시키는 것부터 차 우림까지 완성해낼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마음의 여유는 작은 깨달음에서부터 였다. 내가 갈 길이 단거리가 아니라 아주 먼 장거리라는 것을 알아챈 것부터.


나는 종종 내가 어느 선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선의 방향에 관심이 많다. 물론 내가 선 곳의 성격도, 내 삶을 어떤 방식으로 견인할지, 자아실현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만족감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하여도 생각한다.


선에 대하여 자주 생각해 보는 지점은 내가 이 선 ‘어디에’ 서 있는지를 점검하는 일이다.


내가 목표한 것이 무엇이고 그곳까지 다다르려면 얼마나 정진해야 가능한지를 고민해 본 후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을 파악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내 목표에 다다르기엔 아직 먼 곳에 있는 것 같다. 마라톤에, 장거리 운전에 약한 내가 삶의 중요한 부분을 장거리로 만들다니, 어리석고 몹시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차를 한 잔 마셨다. 갈급하면 그런대로 시원한 물 한 컵도 괜찮겠지만, 또 축 늘어질까 봐 급한 대로 커피 한 잔의 고소함도 좋겠다만, 긴 길을 걷는 나에게 타인에게만큼 다정할 필요가 있다. 차 한 잔 대접하고 대접받는 시간과 경험이 낭비가 아니라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내가 믿고 있는 선이 가늘지 않기를, 기왕이면 그 과정이 좋은 기억과 내실 있는 내용들로 ‘선’이 ‘면’으로 채워지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승모근이 바짝 선 어깨에 긴장을 누르고 단거리 선수처럼 긴장한 목덜미를 다스려본다.

타고나는 것이라지만, 매일 조금씩 생각이 단순해지기를 연습하고, 나를 다잡는 것들에 관대해지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내 목표에 더 선명한 발길로 걸을 수 있길 소망한다.


꿈을 잃고 크게 낙담하던 옛, 아니 그리 오래 옛날은 아니었던 때의 나를 선명히 기억한다. 분명하고 확신에 넘쳤던 선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허망과 상실의 고통에 나는 잘 살 수가 없었다. 시들어가던 내가 붙잡은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때 지독하게 느꼈다. ‘잠드는 사람에게 내일 할 일이 없다는 것은 지독한 고통과도 같은 것이구나.’ 그때의 나는 잠들기 전 수백 번씩 ‘내일의 내가 깨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때를 기록하며 안타까워하는 지금의 내가 있으니, 그 기도는 들어지지 않았다. 늘 상 밝은 빛이 고통스러워 아침마다 해를 등지고 누워 눈물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몇 번의 큰 고비 끝에 현재의 내가 존재하게 되었고 큰 고비들 사이에 새로운 목표가 새싹을 냈다. 새 목표는 내가 보는 중에 씨앗을 뿌리고, 그 위에 얕은 흙을 덮고, 비도 오고 때론 햇빛도 들어, 숱한 바람을 이겨내고 그럴 듯이 자라났다.


그 과정이 너무 오랜만의 일이라 낯설고 이게 맞나 몇 번을 돌아보고 두리번거렸다. 한 번씩 넘어지는 내가 다행히도 단거리 목표가 아닌 아주 긴 장거리 목표가 생겨, ‘어쩌면 해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눈을 뜨면, 밀린 일들이 나를 툭툭 건들듯이 괴롭히지만 백 번 천 번 낫다. 이게 사는 거구나 싶다. 1인의 인간이 사회에서 요구하는(각 사회마다 다르겠지만) 1인씩의 양을 해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지금의 내가 얼마나 성장 한 것인지 나 자신이 아주 잘 알아주기 때문에 괜찮다. 아니, 괜찮기로 했다. 나의 1인분이 북유럽 어딘가에서 요구하는 1인분일지 모르고, 그럼에도 나는 한국에 살지 언정, 나는 가급적이면 나를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비하하지 않기로 목표했다.


되려, 마이너스의 하루를 한탄하며 종료 버튼을 요구하던 내가 어떤 지점에서 달라지고, 그곳에서 내 목표를 선으로 긋고 그 위에 서서 이제는 면으로 채우고 싶다고 한다. 이 과정이 기특하고 이미 오래 수고해왔다고 다독이고 싶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긴 여정 중 밤이 되어 숙소에 들어선 나에게 내가 차 한 잔을 건네며 따뜻한 격려를 덧붙인다. 먼 길을 위해 지금부터 무리하지 말라고, 지치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니 낙담하지 말라고. 오늘의 나는 이전과 완연히 다른 기도를 한다. 이것은 기도이기도, 나를 향한 다짐이기도 하다.




2024년 1월

심경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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