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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리 피디 Apr 09. 2024

당선자 당선인

권력이 언어를 희롱할 때


내일은 22대 국회의원 선거입니다. 가릴 선 選, 들 거 擧, 승자를 들어 올리고 패자는 주저 앉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선거 때마다 논란이 되는 용어가 있습니다. 당선인이 맞느냐, 당선자가 맞느냐 갑론을박이 벌어지죠.


당선인의 시작, 이명박 대통령


이 논란은 2007년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시작됐습니다. 아마 충성스러운 부하 한 명이 그랬겠죠. 왜 영광스런 분께 놈 자者붙이냐고.. 그래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기자들에게 공식 요구했고 당선인이라는 낱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권력은 선출 직후에 정점이고 이후로 줄어든다고 하죠. 그랬으니 당시에 이렇다 할 문제제기도 없었고, 있었다 해도 묻혔을 겁니다. 이후 대부분의 언론은 당선자 대신 당선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물론 배경이 없는 건 아닙니다. 장애자가 장애인이 되었거든요.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비하와 폄하가 장애자라는 용어까지 폐기시켰습니다. 하지만 당선자/당선인, 장애자/장애인은 다릅니다. 권력자의 위신 강화와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계기 자체가 완전히 다르거든요.


가만 보면 넌센스


사회언어학적으로도 두 가지 차원에서 말도 안 됩니다. 첫째, 者가 멸칭인가 하는 점. 애초에 이 글자는 개별의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번역을 이상하게 한 것이죠. 人과 者 모두 사람을 뜻하는데(전자, 후자처럼 thing의 의미도 있음) 중복되헷갈리''이라고 뜻을 단 겁니다. 첩자, 암살자, 살인자 같은 부정적인 쓰임들이 오역을 정당화해 주었을 것이고요. 지금은 많이 섞였지만 人은 연예인, 정치인, 방송인과 같이 직업적 범주로, 者는 개별 차원의 행위자로 쓰였을 겁니다.


둘째, 당선자를 당선인이라 부르면 나머지는 어쩌란 말인가 하는 점. 기자는 기인으로, 지명자는 지명인으로, 운전자는 운전인으로, 소비자는 소비인으로 바꿔야 합니까? 여전히 후보자는 후보자인데 당선자는 당선인으로 신분상승 했지만 낙선자는 낙선인이 못 됩니까? 떨어진 것도 서러운데 놈자를 면하지 못하는 건가요? 배우자라고 하면 이혼 사유가 될지도.. 이런 예상도 못한 채 당선자만 없앴다면 지도자(인) 자격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아, 반대의 예가 있군요. 당선인이란 말이 생길 즈음 노숙자가 덩달아 노숙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슬 맞으면서 자는 사람에 대한 예우로 人을 썼으니 공평한 걸까요? 전국노숙인협회 같은 단체에서 환영 성명이라도 냈는지 궁금합니다.


용어와 정치


언어는 사회현상과 대중의 의식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바뀝니다. 그런데 그 변화의 계기가 권력자의 심기와 권위 때문이라면? 정의롭지도 공평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아요. 우리는 제대로 따져보지도 못한 채 십수 년 동안 낯선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몇년이 지나서야 다시 당선자가 어때서?라고 물을 수 있게 된 겁니다.


그게 독이 되었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갈 길의 복선이었는지 이명박은 인기도 추락하고 퇴임 후 감옥까지 갔습니다. 수감자(갇힌 놈) 된 것이죠(죄자나 피고자는 아닙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의 소유물인 언어를 억지로 바꾸려 했던 권력자의 최후 같기도 합니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고, 보편주의의 반대는 엘리티즘입니다. 권력 쥔 사람들이 대중의 용어를 바꾸려 하는 것은 독재와 엘리트의식입니다. 근거도 부정확하필요성과 명분 또한 약한 용어라면 더욱 반대해야겠죠.


지금 한자 교육, 엉망이다


조금 다른 논점입니다. 우리 말은 수천 년 동안 한자의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풍요로운 언어생활을 위해서는 한자를 아는 것이 중요하죠. 세대에 따라 학교에서 한문을 배우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수험과목이었다가 폐지되기를 반복합니다.


저는 한문 교육이 필수과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가르칠 거면 제대로 가르치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몇달 전 중3 딸아이가 시험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한자어의 훈(訓)을 알지도 못하는 옛말 그대로 쓰고 있더군요.


예를 들면 이런 식. 를 배우는데 지아비 부라고 외우게 하면서 지아비가 뭔지 안 가르치는 겁니다. 차라리 남편이라고 번역하면 좋을 텐데요. 바 소 所, 고무래 정 丁, 쪽 람 藍,.. 이런 어려운 단어를 그냥 외워 식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뜻을 현대화하거나 풀어서 설명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없는 거죠. 딸이 寒을 '찰 한'이라고 배워와서는 가득 (full) 걸로 이해합니다.


모든 외국어는 가장 가까운 모국어의 낱말을 붙여서 익히게 됩니다. 사과는 애플, 개미는 앤트, 이런 식으로요. 아주 어려서 기표(signifie)를 여러 언어로 동시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죠. 하지만 그 뜻이 경직되거나 시대에 뒤떨어지면 곤란합니다. 놈 자 처럼 왜곡되는 경우도 있고요.


한자 교육과 관련해서 의미있는 주장이 있어 소개합니다.

한자 교육이 지지를 받지 못할거라고 생각하는 이유

(관심 있다면 일독)


이 글 내용처럼 저도 서양의 라틴어처럼 한자가 교양의 좋은 수단이 되길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절한 교육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의사불통 해결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금일이나 심심한 사과 논쟁자꾸 생기아야죠.


중국도, 일본도 전통 한자를 버렸고 우리나라와 대만만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곧 잊혀지겠죠. 수천 년의 경험과 지혜마저 같이 잊혀지는 건 아깝습니다. 라틴어는 죽었지만 글자라도 남아서 고대 유럽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죠. 음보다 훈이 더 중요한 이유입니다. 뜻 위주의 한문 교육이 자리잡길 기대해 봅니다.


아, 내일도 지켜볼 겁니다. 후보자와 당선인을 같이 쓰는 무식한 언론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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