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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리 피디 Jun 18. 2024

낭패 어이 어처구니

도처가 낭패인 세상


낭과 패는 이리 즉, 늑대를 뜻합니다. 낭(狼)은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가 짧으며, 패(狽)는 그와 반대입니다. 상상해 보세요. 이 두 마리가 같이 나란히 걷거나 뛰는 모습을.. 서로 사이가 벌어지면 균형을 잃고 넘어지게 되므로 당황하게 된다는 뜻에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다리가 길면 언덕을 오르기 좋겠죠. 반대로 앞다리가 길면 내리막길이 유리할 것 같습니다. 반대의 장면을 상상해 보니.., 낭패군요. 긴 앞다리가 오르막에서 걸리적거리고, 짧은 앞다리 때문에 비탈길에서 뒹구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둘이 같이 가면 분명히 의가 상할 겁니다.


낭패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계획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기대에 어긋나 매우 딱하게 됨.

말이 다양해지는 이유


낭패의 유래를 들었을 때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생각 없이 쓰던 말에 이런 내막이 있었다는 점도 그렇지만, 이런 한자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습니다. 그냥 늑대도 아니고, 다리 길이에 따라 낱말이 달라지다니요. 찾아보니 늑대를 일컫는 한자어는 더 있더군요.


이리로 검색된 한자어. 낭, 패, 산, 시

몇 차례 썼지만 말은 사회의 거울입니다. 고대 중국에서 다리 길이에 따라 늑대를 지칭하는 말이 여럿이라면 그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이 지점에서 상상력을 발휘해 봅니다.


한자는 농경시대에 생겨났을 겁니다. 늑대는 예나 지금이나 가축을 노리는 해로운 동물인데 녀석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지피지기 백전불태라(불패가 아닙니다!), 잘 파악을 해야 합니다. 가만히  보니 종족에 따라 다리 길이가 다른 것이죠. 어떤 놈들이 오냐에 따라 대처방법도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늑대는 낭과 패, 시와 산으로 분화됐을 거예요.


어이와 어처구니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기사님 맷돌 손잡이 알아요? 맷돌 손잡이를 어이라고 해요. 어이! 맷돌에 뭘 갈려고 집어넣고 맷돌을 돌리려고 하는데! 손잡이가 빠졌네? 이런 상황을 어이가 없다고 그래요. 황당하잖아~ 아무것도 아닌 손잡이 때문에 해야 될 일을 못하니까! 지금 내 기분이 그래, 어이가 없네~– 영화  베테랑 중에서

그런데 이는 악당인 유아인이 하는 엉뚱한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하는 걸 보여주려고 감독이 넣은 설정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어이=맷돌 손잡이,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고요. 아이러니합니다.


어처구니 역시 맷돌과 무관합니다. 19세기까지 엄청나게 큰 물건이나 기계, 사람이란 뜻으로 쓰인 기록이 있습니다. 제 추측인데 얼척없다도 비슷한 맥락 아닐까 싶네요. 아무튼 어이없고 어처구니없는 건 맷돌 손잡이가 없어 황당한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낭패와 어이 실종의 시대


요새 뉴스를 보면 딱한 일도 많고 황당한 사건도 많이 발생합니다. 늑대를 보기 힘든 시대인데도 낭패입니다. 또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어요. 어느 시대에나 황당하고 분노를 자아내는 일은 있었는데 요즘 유독 과하게 반응하는 건 아닌가. 가령, 어떤 판결에 대한 댓글을 보면 전부 사형감이래요. 마녀사냥이 횡행하던 중세 유럽 같아요.


어이없는 일에 대한 역치가 낮아지는 듯합니다. 웃고 넘길 수 있는 일에도 죽자고 달려드는 각박한 시대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해학의 작가, 성석제 님의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추천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손가락질 대신 배꼽을 잡는 여유를 선물해 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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