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리 피디 Dec 10. 2024

한국이 싫어서

정나미 떨어지는 순간에 기억할 것들


서울의 봄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장편영화다. 12월 3일 개봉했다 곧바로 내린 서울의 밤은 쇼츠였다. 그런데도 훨씬 충격이 강했다. 12월 7일 토요일 밤은 충격보다는 절망과 분노의 밤이었다. 비유하자면 수사반장이 살인을 저지르려고 하다 실패했는데 잡아넣기는커녕 그대로 자리를 보전해 준 이었다.


'돌아와서 투표해 주세요'라는 간절한 바람이 실망으로 끝났을 때 영화를 봤다. 사실 지난주 내내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독서, 악기연습, 스포츠 중계 관람 등 좋아하던 모든 것들이 멈췄다. 아침마다 듣던 라디오 클래식 FM도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으로 대체됐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각박해진 것이다. 일터에서도 멍하니 뉴스에만 눈과 귀를 줄 뿐이다.


토요일 밤에 넷플릭스를 켠 이유는 한국이 싫어서였다. 고른 영화 역시 '한국이 싫어서'였다. 헬조선에 지친 청년, 고아성이 뉴질랜드에 가서 겪는 이야기, 과거 한국에서의 이야기, 돌아온 뒤의 이야기 등이 섞여서 펼쳐진다.


우리 윗세대에게 나라는 섬김과 충성의 대상이었다. 좋아한다 만다(好惡), 옳다 그르다(是非) 판단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세대에 이르러 국가가 가치중립적인 삶의 배경이 되더니 어느 순간에는 기호와 판단, 급기야 선택의 대상이 되었다.


'나라 꼴이 엉망'이라는 말은 세대별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어르신들은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 세태를 개탄한다(여기서 국가는 주로 보수정당이 배출한 대통령). 젊은이들은 주로 공정하지 않은 시스템이나 인물들, 위선적인 행태를 비난한다(조국이 대표적). 우리 중년들은 각양각색인 듯.


가치판단의 중심에 무엇을 두느냐의 차이다.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뭐야?!'라고 울부짖는 청년을 노인들은 한심하다고 보는 것 같다. '지들이 나라한테 뭔가를 기여해야지...' 애국심은 전체주의의 위험을 내포하고 개인주의는 무정부주의의 기초다. 


미움엔 금도가 없다. 하지만 행동에는 금도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종북세력이 미웠고 반국가세력이 싫었어도 계엄은 하지 말았어야 할 짓이다. 똑같이, 정반대로, 아무리 윤석열이 밉고 그 당이 싫고 그를 지지한 사람들이 원망스러워도 한국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충忠  사상이 아니다. 각자의 행복을 위한 팁이다.


'한국이 싫어서'라고 말할 때, 그 한국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한국은 증오의 대상으로서 너무나 포괄적이다. 한국의 싫은 '무엇'에는 그 모든 것이 들어갈 수 있지만 반대로 그 모든 것이 싫은 게 아니라면 표현을 재고해 봐야 한다. 너무 편리하게 합리화해선 곤란하다.


내가 한국이 싫어서란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한국이 싫어서인데 그 싫은 한국은 대통령과 투표 안 한 정치인들에 국한된다. 이 성급하고 강렬한 일반화는 다시 좋은 한국의 구성요소로 채워져야 한다. 사랑하는 것들로 다시 국가관을 채워야 한다.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어느 순간 인내를 넘어선다면 나도 고아라처럼 아주 떠날지도 모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