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기간이 끝나면 임차인은 임대인이 지정하는 곳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
우리의 계획을 들었을 때 중개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물었다.
“어떻게 쓴다고?”
그의 물음에 호기심보다는 황당함이 묻어나 나는 살짝 불쾌해졌다. 게다가 초면에 반말이다. 어디에나 이런 사람은 있다. 관심의 탈을 쓴 오지랖. 배려는 없고 주제는 넘음.
“코인 빨래방 한다고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요’라는 뒷말을 느끼고 상가 주인이 도착할 때까지 제발 잠자코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니, 무슨 촬영장으로 쓴다고 안 했나?”
부동산 중개인은 나와 주작을 번갈아 바라보며 캐묻는다. 조금 전 우리끼리 하는 얘기를 엿들은 모양이다. 모든 거간의 바탕이 참견이라는 점은 알겠다. 하지만 이 사람의 태도는 분명히 오버다. 넘지 않았으면 하는 선을 넘었다. 자기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을 못 견디고, 굳이 쓸데없는 말을 얹어야 속이 풀리는 그런 류인 듯했다. 불쾌감 때문인지 초면에는 사람 좋아 보이던 민머리도 고지식함의 징후처럼 여겨졌다.
“저희가 빨래를 하든, 촬영을 하든 그게 계약이랑 상관이 있나요? 주인분이 안 된대요?”
참다못한 주작이 노골적으로 따지고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사장님, 어제 제가 전화로 말씀드렸잖아요, 빨래방 한다고. 그리고 빨래방 하면 동영상도 못 찍어요?”
내가 거들자 대머리 중개인이 머쓱해진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민망해진 시선을 문밖으로 던지며 말했다.
“허어, 이 양반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혼잣말로 뻘쭘함을 무마하려는 수작이다. 나는 이런 류의 인간이 싫다. 체면이 중요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감정을 헤아릴 줄 모른다. 상대가 처한 상황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그걸 숨기지 않는다. 말문이 막히면 뚱딴지같은 변명을 늘어놓거나 화제를 바꾼다. 사과가 필요한 상황은 눙치고 불필요한 오지랖은 실현하고야 만다.
잠시 침묵. 그러나 그 불완전한 평화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둘은 부부인가?”
방송계에서는 ‘마가 뜬다’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오디오가 빈다’는 표현도 있다. 몇 초 동안 말이 없는 상태다. 이 부동산 중개인은 잠깐 마가 뜨는 것도 참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불필요한 이야기, 심지어 불쾌한 이야기도 침묵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봐요, 아저씨…….”
나와 주작-그러니까, 주승아 작가-이 동시에 항의하려는 찰나,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이고, 사장님 오셨습니까?”
중개인이 일어나며 악수를 청했다.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게 해주는 임대인이 반가웠으리라. 상가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표정 없이 그가 내민 손을 잡으면서 우리 쪽을 흘깃거렸다. 주작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는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탁자 위의 등기부등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살짝 엉덩이를 들어 반쯤 선 채로 목례를 했다.
“아, 이쪽은……. 세탁소인가, 사진관인가?”
대머리 중개인이 건물주에게 우리를 소개하려다 주춤하며 우리 쪽을 내려다보았다.
“셀프 코인 빨래방입니다.”
주작이 성을 내기 전에 내가 가로채며 친절하게 대답했다. 건물주가 맞은편 소파에 앉자 나도 엉거주춤한 자세를 접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주인은 생각보다 젊었다. 이 건물 안에 상가를 서너 채 갖고 있다면-이 역시 오지랖 중개인이 알려준 정보다-적어도 오십 넘는 중년으로 예상했는데 많아야 마흔 언저리쯤으로 보였다.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재색 세미 정장을 입었고 올라간 바짓단 아래로 낡은 스니커즈가 보였다. 나는 그 신발이 명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몇 해 전 후배 피디가 허름한 운동화를 신고 왔길래 나도 모르게 잔소리를 내질렀다.
“야, 홍피. 아무리 바빠도 신발은 좀 빨아 신고 다녀라. 그게 뭐냐?”
“선배, 이거 새 거예요. 엊그제 영접한 신삥이라고요.”
억울하다는 듯 투덜거리며 덧붙였다.
“모르시는가 본데 요것이 골든구즈라는 거예요, 황금거위. 빈티지 고급 브랜드! 교양 피디답게 상식과 교양을 좀 쌓으십쇼.”
날라리 쇼피디에게 반격을 당했다. 자랑이 안 통해 억울했는지 검색한 포털 화면까지 들이대는 것이다. 과연 백만 원에 이르는 가격이었다.
“오우, 몰라 봐서 미안합니다, 명품 홍피님. 그런데 계속 모르고 싶네. 앞으로 지저분한 컨셉의 명품 자랑은 교양 있는 사람들 앞에서만 할 것!”
그렇게 허세 저는 후배 피디가 억지로 알려준 고가의 신발이 내 앞에 있었다. 젊어 보이는 나이에 비해 임대인의 행동거지는 노인 같았다. 들어오는 걸음걸이와 속도, 인사며 시선 두는 태도가 동네 노인회장쯤의 고루함을 느끼게 했다. 중개인이 마가 떠 불편한 마음에 계속 지껄이는 캐릭터라면 임대인은 침묵 속에서도 편안해 보였다.
“자, 임대차 조건은 전화로 모두 말씀드렸고, 등기부등본도 아까 다 확인하셨고. 여기 제가 미리 뽑아놓은 계약서 보시고 궁금한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중개인이 계약서 두 부를 양쪽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와 주작, 상가 주인이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중에도 부동산은 계속 말을 이었다.
“하아, 요새 참 경기도 어려운데 젊은 사람들이 큰 결심을 했네. 그럼 그럼. 모름지기 젊은이는 패기가 있어야 돼요. 도전이야말로 젊은 세대의 특권이지, 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나왔다. 모름지기. 계약서를 내려다보는 주작의 미간도 찌그러진다. 개의치 않는다는 듯 중개인의 참견은 계속되었다.
“우리 구 사장님도 잘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월세를 낮춰 주시니까 또 젊은이들이 이렇게 창업도 하는 거지. 복 받으실 거예요. 윈윈이야, 윈윈. 하하”
“뭐 별다른 건 없네요. 찍으면 되나요?”
상가 주인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도장을 꺼내며 감정 없이 말했다. 중개인과는 달리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 같았다.
“잠깐만요. 여기 특약란에 있는 건 뭐죠?”
주승아 작가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녀를 보던 눈들이 다시 탁자 위 계약서로 내려갔다.
“아하, 이거 아까 이분, 정지강 씨한테 전화로 설명한 건데…….” 중개인이 나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런데 이 여자분은 누구시지? 계약자는 여기 남자 사장님이신데…….”
“아, 제 법률대리인입니다.”
황급히 둘러댔으나 나조차 내 말에 놀랐다. 피디와 작가 관계라고 말해 봐야 소용없을 터였다. 꼼꼼한 주작이 계약에 필요해서 동행한 것은 맞지만 변호사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내 말은 맞다고도, 틀렸다고도 할 수 없었다. 중개인의 눈은 더 커졌다.
“그럼 변호사신가? 난 또 부부나 동업자인 줄 알았네. 아무튼 월세를 30이나 깎는 대신에 이 특약 조건은 지켜줘야 됩니다. 그게 여기 구 사장님의 뜻이기도 하고.”
주작은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계약서를 내려다보았고, 임대인은 여전히 감정 없는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임차인은 임대인이 지정하는 곳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 이 비용은 임대인이 부담한다.
읽을수록 희한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밥 한 끼 먹는 것이 무슨 대수랴 싶어 나는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물며 저쪽이 산다는데…….
생각해 보면 임대와 임차, 즉 빌려주고 빌리는 계약은 특이한 구석이 있다. 생면부지의 사람끼리 한쪽은 임대인, 한쪽은 임차인이 되어 인연을 맺는 것이다. 이렇게 건조한 관계도 인연의 범주에 포함된다면 말이다. 인연이 맺어지려면 대차대조 후에 균형이 맞아야 한다. 보증금과 사용료, 공간 조건, 사용 목적 등이 서로가 감내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도장 찍은 계약서를 들고 우리는 부동산 중계소를 나와 같은 건물의 카페로 들어갔다. 우리가 빌린 공간은 300세대가 거주하는 40층 짜리 주상복합 건물의 2층에 있었다. 상가파트는 3개 층으로 되어 있는데 거주파트와는 출입과 주차가 분리다. 거주민은 상가를 마음대로 드나들지만 상가 손님은 거주공간으로 들어갈 수 없다.
“돈이든 물건이든 공간이든 빌리는 사람이 약자다, 그런 생각 안 들어요?”
아이스아메리카노에 빨대를 꽂으며 주승아 작가가 말을 꺼냈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더니, 빌려주는 사람은 역시 강자. 지난번에 이런 일도 있었어요. 전세 연장 때문에 집주인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나도 모르게 ‘네, 주인님’ 하면서 전화를 받은 거 있죠? 연락처에 ‘집주인 아무개’ 이렇게 저장을 해놨거든요.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확 끊어버리고 싶더라니까.”
“뭐, 틀린 호칭은 아니네. 내 주인은 아니어도 주인님은 주인님이지.”
그녀의 억울함을 잠재워 보겠다고 나는 건조하게 반응했다.
“그렇긴 한데, 말을 내뱉고 나니 비참해지는 거 있죠? 나는 세입자일 뿐인데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노예가 된 느낌이랄까? 으으, 싫다.”
주작이 고개를 흔들며 진저리를 쳤다.
“그러니까 우리도 빨리 성공해서 저걸 사버립시다. 건물 몽땅 다! 설움 따위 느껴지지 않도록.”
“주작 집이나 사. 우리 빨래방 스튜디오는 월세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만족이야.”
사실이 그랬다. 방랑하던 집시가 거처를 얻은 셈이었다. 우리 건물은 아니었어도 2년 만에 정착하게 된 것은 엄청난 성과였다.
“그나저나 그 구 사장이라는 임대인, 좀 이상하지 않아요? 언행도 그렇고, 계약 끝나는데 뭔 놈의 식사는…….”
화제를 바꾼 주작이 투덜거렸다.
“뭔 상관이야? 좋은 조건에 빌렸으면 됐지. 저런 캐릭터가 집주인으로서는 좋을 거야. 과묵하고 참견 안 하고. 그나저나 공운 형님한테 이번 주 촬영 일정 알려줬나?”
“아뇨. 피디님이 하신다고 했잖아요. 사무실 계약 건이랑 같이 설명한다고…….”
“아, 그랬지. 쏘리.”
나는 핸드폰을 열어 공운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