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로 얼룩진 스케이터들의 살얼음판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말 있잖아? 난 그거 안 믿어."

by 이지완

구독자가 급감한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다. 골드 버튼을 눈앞에 두고 우리 채널은 논란의 중심에 섰다. 누리꾼들에게서 기레기라고 비난받던 기자를 출연시켰다가 호되게 당한 것이다.

대중은 대부분의 기자 이름을 모른다. 바이라인에 이름 세 글자만 올리는 신문기자에 비해, 화면에 얼굴까지 나오는 방송기자는 기레기가 될 확률이 높다. 우호적인 팬덤이든 혹독한 비난이든 더 근접한 위치다. 게다가 송정우 소방관의 사례에서 확인한 것처럼 영상은 엄청난 확대재생산의 재료가 된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출연시킨 방송기자는 기레기 이미지를 세탁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명 세탁소라는 이름마저 오염시켰다.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아니다. 모두의 탓이다. 선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내가 일하던 방송사의 보도국 기자를 출연시킨-내가 몸담았던 회사 소속인 점도 공격당했다-내 탓이기도 하고, 그의 삐딱한 태도가 못마땅해 어이없는 질문을 쏟아낸 공운의 탓이기도 하다. 대중의 역린을 건드리는 토크 내용을 포함시킨 주작의 책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솔직함을 빙자한 무례한 발언으로 쓰레기 기자라는 오명을 공고히 한 본인의 탓이기도 했다. 우리 채널을 시샘하던 사이버 레커들이 번갈아가며 난리법석을 떨었고, 이를 또 언론이 기사화하면서 악순환에 빠졌다. 이들은 포동포동 살찐 가젤을 발견한 표범처럼 맹렬했고 집요했다.

엄청난 비난과 저항이 할퀴면서 95만 명의 구독자 중에 13만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말이다.

“계속 줄고 있어요. 해명 게시물 말고도 다른 대책을 마련해야 됩니다.”

마치 검은 금요일의 증권거래소 직원처럼 망연자실한 승아가 말했다.

“해명을 추가해 봐야 소용없어. 맞불을 놓아야 해. 논점을 바꿔야 된다고.”

연예계에 몸담았던 공운은 구설 위기에 대한 대처도 뛰어날까?

“승아 씨, 지금 예비 출연자 중에 제일 센 거 뭐 있지? 가장 센세이셔널한 거 말야.”

우리는 기울어져 가는 판을 뒤집을 만한 소재를 뒤졌다. 이렇게 해서 긴급하게 섭외된 게스트가 바로 팀 추월 스케이터들이었다. 반년 전쯤에 있었던 국제대회에서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선수들 사이에서 불화설이 터졌었다. 이들이 출전한 종목은 빙속의 단체전이라 불리는 팀 추월 경기였다. 한 팀을 이뤄 출전하는 3명 모두가 결승선을 통과해야 하는데 마지막 선수의 기록이 팀의 기록이 된다. 따라서 한두 사람의 기록보다는 모두의 고른 기량이 중요하고, 전략을 잘 짜서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팀워크가 중요한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표팀의 마지막 경기에서 이상한 장면이 연출됐다. 경기 중반 이후 마지막 멤버가 눈에 띄게 쳐졌다. 앞의 두 선수는 좋은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으나 마지막 선수가 늦는 바람에 상대팀에 패하고 말았다. 경기를 관람하던 국민들도, 중계를 하던 캐스터와 해설자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더 황당한 것은 앞의 두 선수가 마치 개인전에서 기록을 깬 것처럼 밝은 표정이었다는 점이다.

“논란은 일파만파 커졌어요. 팀 추월이 아니라 팀원 추월이라는 비아냥이 쏟아졌죠. 함께 기록을 깨랬더니 팀을 깨버렸다는 비난도 날아들었고.”

“이름이 뭐였더라, 그 선수들?”

주승아 작가의 브리핑을 들으며 공운이 물었다.

“김성은, 라현지, 차주연 이렇게 3명이었는데 차주연이 꼴등으로 들어온 선수예요.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빙상연맹도 해명이란 걸 했는데 그게 또 이상해요. 선수들이 순간적으로 전략을 오해했다는 식이었죠. 밥만 먹고 훈련만 하던 선수들이 그럴 리 없는데도 말이죠. 무마하기 급급했던 거예요. 분노의 여론은 가라앉지 않았고, 집요한 한 언론에 의해 선수간 불화설의 정황이 드러나게 됩니다.”

단독보도의 내용은 김성은과 라현지가 합세해 차주연을 왕따시켰다는 거였다. 경기에서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차주연은 따돌림을 당했고, 거의 대화조차 없었다는 것이 폭로 내용이었다. 김성은과 차주연은 대회가 끝나고 차례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응원해 주신 국민들께 죄송하긴 하지만 나는 억울하다, 피해자다, 상대방이 나쁜 년이다, 대략 이런 입장이었다. 주어와 목적어만 바꾸면 양측의 주장은 엇비슷했다.

“팀 내 불화라면 내가 전공이라 잘 알지” 넉살을 섞어가며 공운이 말했다. “억울한 사람은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우기게 돼. 뜯어보면 모든 관계는 쌍방향인데도 말야. 20년 전 나는 피해를 호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해자가 됐지. 어쩌면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아 침묵했는지도 모르겠네. 피해자로 동정받느니 가해자로 비난받는 게 덜 힘들었을 테니까. 적어도 내 이름 공근운처럼 앞뒤와 안팎이 다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

팀 추월 스케이터들의 불화설이 20년 전 포에버보이즈 스캔들을 소환했다.

“에이, 형님. 다 잊었다고 해놓고 다시 얘기하시네. 기왕 이렇게 된 거, 공운의 고백 한 편 더 찍어볼까요? 주작아, 카메라 받쳐라.”

내가 농담을 던지자 승아는 크게 웃었고, 공운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우리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하죠. 이번엔 녹화가 아니라 생방으로 할 겁니다. 불화의 당사자가 두 명이니까 3원 생방송이 되겠네. 서로 네 탓이라고 우기고 있으니까 빅매치가 성사될 수도 있겠어요. 위태로운 자신의 명예를 걸고 한판 결투를 벌이는 거지. 주작은 꼭 둘 다 설득시켜야 돼.”

큰 위기에는 큰 결심이 필요한 법이다. 내가 구상을 설명하자 공운과 승아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3자 대면 진실게임 같기도 하고, 헤비급 타이틀 매치 같기도 하네. 재미있겠어, 하하.”

공운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잠시나마 불안과 걱정이 사그라들었다.


어느 촬영보다 더 큰 긴장감이 맴돌았다. 방송국에 다니는 10년 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생방송이었고, 무엇보다 갈등의 당사자 둘이 출연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스튜디오인 오명 빨래방에서는 진행자인 공운이 접속하고, 김성은과 차주연은 각자의 장소에서 연결할 예정이었다.

우리는 3일 전부터 이 대형 이벤트를 홍보했다. 두 사람의 사진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게시판에 올렸고, 촬영 예정 3시간 전부터 채널을 열어 두었다.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동접자는 2천 명을 넘었고, 실시간 채팅창에 비난과 응원, 저주와 기대를 배설하고 있었다.

공운도 긴장이 됐는지, 1시간이나 남았는데 스튜디오에 얼굴을 비췄다.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에서 노래 부를 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는데. 나이 먹으면 겁이 늘고 소심해지는 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잘하실 거예요. 억지로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고, 순리대로 흐름대로 흘러가 보자고요.”

공운을 안심시키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 어려운 섭외를 우리의 주승아 작가는 어떻게 해냈대? 존경스러운데?”

“공운 님도 참, 무슨 존경까지. 양쪽에 딱 한 마디씩만 했어요. 안 하셔도 된다, 하지만 저쪽이 출연하면 방어는 못 하신다, 사람들은 말하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지 침묵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않는다, 뭐 그런 얘기요.”

라이벌 의식을 이용한 셈이다. 승아의 교묘한 영악함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되었다.

모든 촬영 준비를 마치고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며칠 전 오명 빨래방은 오픈 준비가 끝났다. 승아와 캐릭터 디자이너가 애쓴 덕분에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의 셀프 빨래방이 완성되었다. 점포 한가운데는 대형 원목 탁자가 자리 잡았다. 신비로운 결의 물푸레나무였다. 사람들은 이 위에 빨랫감을 펼치고 다림질을 하고 옷과 이불을 정갈하게 갤 터였다.

세탁과 건조에 필요한 기본적인 시설보다 우리는 휴게와 소통 공간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출입구 반대쪽은 대기 공간이다. 혼자 책을 읽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 벽면 자리 5석-승아는 이곳을 ‘벽향’이라 불렀다-, 둘이 앉아 대화와 보드게임을 할 수 있도록 한 테이블 3개, 최대 8명까지 앉아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테이블 1개가 들어왔다. 빨래뿐만 아니라 빨래하는 사람의 마음도 정갈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밝은 분위기의 가구와 소품을 골라 정성스럽게 배치했다.

고정 촬영인 화요일 오후와 금요일 오전에 셀프 빨래방은 문을 닫기로 했다. 다른 시간은 여느 코인 빨래방처럼 누구나 들어와 옷과 이불을 세탁할 수 있다. 전날 승아와 나는 새로 채용한 빨래방 사업 담당 직원인 박하영 씨와 함께 시루떡을 맞춰 주변 상가에 돌렸다.

“드디어 개업이구먼.”

1층 부동산 사무실에 들어가자 대머리 중개인이 반겼다. 마주칠 때마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불쾌한 오지라퍼면서 정다운 이웃 같기도 했다. 무례한 참견과 따뜻한 관심의 스펙트럼이 있다면 이 아저씨는 양 극단을 오가는 듯했다.

“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영 씨의 공손한 인사에 대머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와 주작의 건조한 반응과는 달라서였을 것이다.

“돈 많이 벌어요. 젊은 사람들이 흥해야 나라가 흥하는 거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장님께서도 많이 도와주시고 소문도 많이 내주세요.”

역시 사업은 이런 사람이 해야 된다. 나처럼 돈 벌 기대보다 피곤해질 우려가 큰 사람은 글렀다.

“아, 상가 주인 고 사장 알지? 지난번 계약 때 만났던. 그 양반도 축하한다고 전해 주래. 응원하겠다고 하던데.”

이상한 계약 조건을 걸지 않나, 중개인 닮아 오지랖을 떨지 않나, 점잖아 보였던 인상에서 불길함이 감지됐다.

“암, 그래야지, 모름지기 집주인이라면. 요새는 월세 받아 처먹는 데만 혈안이 된 인간들이 너무 많아. 세입자가 장사는 잘 되는지, 어려움은 없는지 살펴야 제대로 된 주인이지. 안 그래요, 젊은 양반들?”

이미 진작에 피곤해진 주작이 내게 눈짓을 했다. 우리는 떡을 내려놓고 부동산을 나왔다.


약속 5분 전, 공운이 먼저 오프닝을 했다.

“오명 세탁소 문 열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정말 특별히 실시간 스트리밍인데요, 이미 5천 명 넘는 손님들이 우리 세탁소에 들어와 계십니다. 모두들 반갑습니다.”

긴장한 기색은 어느새 사라지고, 공운은 능수능란하게 시작했다.

“예고해 드린 대로 오늘은 국가대표 밉상, 김성은과 차주연, 차주연과 김성은의 타이틀 매치로 진행됩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대한민국은 이 두 선수의 불화설로 뜨거웠습니다. 우리는 뒤에서 언론 플레이 하고, 호박씨 까고 뒷담화 튕기고, 이런 거 싫어하지 않습니까? 몇 달 동안 충분히 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오늘은 아예 터놓고 말하는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곧 김성은, 차주연 두 선수가 접속할 텐데요, 궁금하거나 의견 있으시면 댓글 달아주세요. 대신 물어보고 대신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잠시 후에 돌아옵니다.”

화면이 썸네일 이미지로 전환됐다. 접속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예정 시간이 되었을 때 동시접속자는 13만 명이었다. 스트리밍에 먼저 접속한 것은 차주연이었다. 이미 오전에 접속 환경과 방법을 모두 협의해 둔 상태였기 때문에 어려움은 없었다. 동시에 시작하기로 했기 때문에 공운은 먼저 접속한 차주연과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화면에는 자못 심각한 두 사람의 얼굴만 멀뚱히 떠 있을 뿐이었다. 2분쯤 흘렀을까 미리 알려준 링크를 타고 김성은이 들어왔다. 차주연은 집으로 보이는 곳이었는데 김성은은 훈련장인지 뒷배경에 아이스링크가 보였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의 게스트 두 분을 정식으로 소개합니다. 빙상 국가대표 김성은 선수와 차주연 선수입니다.”

둘은 화면에 대고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실시간 채팅 창은 읽기조차 힘들 정도로 댓글이 폭주했다. 한쪽을 응원하는 멘트와 함께 슈퍼챗도 쏟아졌다. 몇천 원부터 몇십만 원까지 다양했다.

“그간에 있었던 모든 일은 거두절미하고, 두 분의 지금 입장부터 듣겠습니다. 누구부터 할까요, 음. 그래도 연장자인 차주연 선수?”

모두의 시선이 차주연이 접속한 창으로 쏠렸다. 갈등 상대인 김성은은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입장한 이후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연장자 소개에 비웃음으로 느껴지는 표정이 얼핏 스쳐갔다. 발언 요청을 받은 차주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방송국의 생방송이었더라면 사고다. 나는 기다렸다. 오늘 콘텐츠는 침묵조차 메시지다. 15초가량 침묵하던 그녀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저는 오늘 저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여기 접속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다시 잠깐의 침묵. 조용성 변호사 이후 또 한 번의 반전인가? 모니터를 보는 내 눈에 의아함을 품은 글자들이 지나갔다. 뭐래, 심경변화, 폭탄선언인가, 자살할라나, 그래 개과천선해라, 썅년 무슨 말을 하려고, 사과해, 욕하려나, 울지 마 울지 마…….

“제가 동생들을 괴롭혔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채팅 창은 더 빠른 속도로 말들을 올려 보내고 있었다. 접속자 37만 명.

“아, 지금 차주연 선수가 짧게 입장을 밝혔는데요, 그동안의 태도와는 다르게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셨습니다. 예상외의 전개인데요, 그렇게 입장을 바꾸신 이유를 묻고 싶네요, 주연 선수?”

침묵이 길어지자 공운이 재빠르게 후속 질문을 했다.

“제가 불쌍해서요. 지난 대회 이후 밤잠을 거의 못 잤거든요. 이제는 발 뻗고 자고 싶습니다.”

차주연이 탁자 위의 컵에서 음료를 집어 들었다. 나는 반대편 창에서 김성은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에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당혹감이 엿보였다. 결기 있게 싸우려고 링에 올랐는데 흰 수건이 먼저 날아온 셈이었다. 음료를 내려놓은 차주연이 말을 이었다.

“기강 잡는다고 제가 먼저 애들을 괴롭혔어요. 저도 선배들에게서 그런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특히 꼬박꼬박 대드는 성은이한테 모질게 굴었습니다. 후배의 정당한 방어였는데 저는 반항으로 여겼죠. 스케이트 칼날로 귓불을 건드리는 폭행도 했습니다. 물리적인 해를 입히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위협을 가했고, 동생들이 힘들었을 겁니다.”

차주연의 담담한 자기 고백이 이어졌다.

“애들이 저를 따돌리고 먼저 치고 나갔을 때 저는 알았습니다. 이 년들이 짜고 나를 엿먹이고 있구나. 반 바퀴나 떨어진 채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 저는 억울했습니다. 내가 뭘 어쨌다고, 후배들에게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서러웠습니다. 연맹에서는 사건이 무마되길 바랐지만 저는 억울함을 풀어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방금 전 화면에서 성은이 얼굴을 보자 한순간에 마음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저는 거울 속에서 속상한 제 얼굴만 봤지, 한때 웃으며 같이 운동하던 동생들의 얼굴은 보지 않았습니다. 내게 모질게 대했던 그들의 이름만 공책에 휘갈기곤 했으니까요.”

다시 침묵. 동접자가 줄었다. 29만 명. 흥분한 개싸움을 기대했던 구경꾼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휴대폰이 진동으로 몇몇 언론사의 속보를 띄웠다. ‘빙속 차주연 선수, 후배들 폭행 인정’.

“음, 차주연 선수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는데요, 이에 대해 김성은 선수 입장은 어떤가요?”

공운의 질문에 김성은이 움찔했다. 두 손으로 가리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서 훌쩍거리는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씨발, 이런 좆같은…….”

울먹임과 욕설이 섞여 나왔고, 당황한 공운이 개입하려는데 김성은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이런 좆같은 경우가 어디 있어요? 나는 실컷 욕하려고 나왔는데, 저년이 한 짓 하나하나 다 따지려고 나왔는데 저렇게 순순히 인정하는 법이 어디 있냐고요. 저건 반칙이에요. 페어플레이가 아니라고요!”

울먹이면서 시작한 그녀의 발언은 점점 강해지더니 엄청난 포효가 되었다. 김성은의 외침은 모두를 당황시켰고 차주연마저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이내 큰 소리의 울음소리가 건너왔고 우리는 어쩔 줄 몰라 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 편집자를 시켜 김성은 쪽 오디오를 절반으로 줄였다. 그리고 공운에게 계속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아, 여러분. 살얼음판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깨졌네요. 두 분의 입장은 잘 들었고, 접속하신 분들 의견을 좀 볼까요? 이거 하도 빨라서 읽지도 못하겠는데? 아, 슈퍼챗 쏘시는 분들 메시지는 제법 오래 떠있군요. 그거 위주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사과를 안 받아주고도 후배냐, 저러니 선배들한테 욕먹지, 아무리 그랬어도 국제대회에서 할 짓이었나, 사과하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이다, 자기 분을 못 참는 김성은 언제 철들래, 라현지는 방관자인가, 라현지도 전화연결 해라, 공운아 얼른 화해시켜라, 오명 세탁소 노벨평화상, 선배가 사과했는데 후배가 거부, 진짜 사과받아야 할 사람은 차주연…….

시작할 때는 팽팽했던 여론이 급격히 차주연 쪽으로 흘러갔다. 차주연의 사과는 용기, 김성은의 거부는 꼬장, 이런 프레임이었다. 국가대표 밉상은 이제 김성은으로 단일화되었다.


“나는 김성은 마음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테이블 위의 소주잔을 엄지와 중지로 빙빙 돌리며 승아가 말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뒤풀이 자리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스트리밍 송출의 여파는 컸다. 여러 언론에서 두 사람의 갈등을 속보로 기사화했고, 우리 채널은 바로 90만 구독자를 회복했다. 조회수는 무려 2,500만 뷰를 넘겼다. 기레기 콘텐츠로 추락하고 있었던 채널이 급반등 한 것이다. 노림수는 통했고 성공이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복잡했다. 촬영장을 정리하면서 술자리를 제안한 공운과 기다렸다는 듯 찬성한 주작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우리는 빨래방과 같은 건물 3층에 있는 감자탕 집에 둘러앉았다.

“영화 밀양 봤죠? 거기서 전도연이 확 돌아버리잖아요. 자기 아들 죽인 살인범을 용서해 주러 면회를 갔는데 그자가 하나님한테서 용서받았다면서 환한 표정을 짓는 거지. 전도연이 이렇게 말해요.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 인간을 먼저 용서할 수 있나?’ 오늘 김성은이 그런 마음 아니었을까 싶어요.”

말을 마치고 승아가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어허, 같이 먹자. 지금 주작 음주 속도가 너무 빨라. 시속 3병 페이스라구.”

공운이 손사래를 치며 승아를 말렸다.

“나도 기분이 찜찜하더라고. 더 할 말이 없어서 15분 만에 끝냈는데도 10시간 떠든 다음에 지친 느낌이야.”

“형님 수고 많으셨어요.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건 에너지 소모가 크죠.” 비어있던 공운의 잔에 내가 소주를 채웠다. “밀양의 전도연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난 차주연이 머리를 잘 썼다고 봐. 의도했든 아니든 결과적으로 자기 이름은 깨끗이 세탁했잖아.”

“그러게. 차주연은 사과라는 무기를 이용해 이미지 회복에 성공했고, 김성은은 그걸 안 받아서 다시 욕받이가 되고 있네요. 김성은 선수는 이걸 스포츠 승부로 보는 듯했어요. 한판 겨뤄보겠다고 단단히 준비해서 출발선에 섰는데 저쪽이 항복하니까 분통이 터졌겠지. 전도연은 용서할 기회를 박탈당해서 삐뚤어졌고, 김성은은 싸울 기회마저 박탈당해 정신줄을 놓아버린 것 같아요.”

주작이 그날 스트리밍을 총평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말 있잖아? 난 그거 안 믿어. 갈등은 애초부터 승부가 아닌지도 모르지. 승부에는 승리와 패배가 있지만 불화는 원인과 결과만 있는 게임이야. 포에버보이즈 불화설 돌았을 때, 그래서 팀이 해체됐을 때 사람들이 그랬지. 넷 모두가 진 게임이라고.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냥 흐름인 거야. 원하는 방향이 아닐 때도 있지만 흐름은 흐름이지. 카이나 다른 애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그래. 가해, 피해도 아니고 승리, 패배도 아니라고.”

말을 마친 공운이 냄비에서 돼지 등뼈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나저나 오늘 방송으로 오명 세탁소는 오명은 벗는 걸까요?”

“글쎄, 공운 형님 얘기대로 그것도 그냥 흐름 아닐까? 더러운 쪽으로 잠깐 우회했다가 돌아온 물길 같은.”

말해놓고도 민망해져서 나는 술잔을 들었다. 잔 두 개가 다가와 청명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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