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에게 겨울은 아주 오랫동안 공포의 계절이었다. 사냥감을 찾지 못해 굶어 죽거나 사냥감을 찾다가 얼어 죽거나. 여름은 어원 그대로 먹을 것들이 열리는 계절이고, 활력과 성장의 계절이었다. 이제 오랜 수식어를 바꿔야 할 때다. 겨울은 온화해졌고 여름은 포악해졌다. 공포의 계절이라는 오명은 이제 여름에게 붙여야 마땅하다.
“지구온난화라는 말, 너무 온건하지 않아요?”
얼굴이 발개진 채 손부채질을 하며 주작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더위를 먹었나, 뭔 뜬금없는 얘기야?”
대본을 검토하다 고개를 들며 공운이 말했다.
“아니, 그렇잖아요. 온난화가 아니라 열난화라고 해야 맞지. 아직 6월인데도 35도, 이게 말이 돼요? 지구열난화라고 못 바꾸는 건 미지근한 사람들 탓이에요. 화끈한 맛이 없어. 도가 나올까 봐 걱정돼서 모를 못 노리고, 개나 걸에 만족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요.”
꼭 나를 탓하는 말 같았다. 화끈하지 못한 성격의 나는 얼굴만 화끈거렸다.
“지난번에 표인후 선생은 은퇴도 화끈하게 하시던데 딱 주작 스타일이겠네. 연락해서 같이 찜질방에라도 가, 화끈하게.” 공운이 킥킥댔다. “아, 그나저나 그 행방불명이라는 스토커는 요새 어떤가, 잠잠해?”
“이불킥에 매주 슈퍼챗은 쏘는데 나한테 큐피드의 화살을 안 쏘네요, 빙신같이.”
승아가 불만인 듯 입을 삐죽거렸다.
“왜, 사랑의 화살을 맞고 싶어?”
궁금하던 걸 대신 물어주는 공운이 고마웠다.
“맞고 싶진 않죠. 날아오는 화살을 딱 잡아서 부러뜨리려고요. 그러려면 저쪽이 일단 쏴야 할 거 아녜요? 거절 한번 대차게 하고 나면 속이 다 후련하겠는데…….”
화살을 잡아 부러뜨리는 시늉을 하며 승아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 묘한 감정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생갈치1호의행방불명이란 자는 더 이상 위협적인 스토커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그녀가 싫어하는 것도 고무적이었다. 그런데 뭔가 꺼림칙했다. 나도 그런 인간인가, 개나 걸에 만족하는 인간인가, 제대로 화살 한번 쏘지 못하는 햄릿인가, 하는 자책감이 드는 거였다.
주승아 작가에 대한 내 마음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강도는 올라가는데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덜 비겁해지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화끈하게 고백하고 대차게 차여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멍청한 짓이다. 주작은 나와 계속 같이 일해야 하는 사람이다. 모가 나와 성공해도, 도가 나와 폭망해도 문제다. 우유부단해지지 않는 방법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자체를 없애는 길 뿐이라고 여러 번 다짐하게 되는 거였다.
“집 앞에 또 나타나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인스타그램에 DM을 보내더라고요. 처음엔 귀찮았는데 읽다 보니 내용이 좋은 거 있죠?”
스토커에게 호감을 갖다니…….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스톡홀름 신드롬인가? 내 머리에 안도감 대신 다시 긴장감이 퍼지는 게 느껴졌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영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거기서 주인공 여자아이 이름이 바뀌잖아요. 치히로에서 센으로. 귀신 온천에서 만나게 되는 남자애의 이름은 하쿠인데 그도 코하쿠라는 본명이 따로 있었죠. 치히로는 어린 시절 강에 빠졌었는데 그 강의 이름이 코하쿠였어요. 잊었던 기억을 되찾고 원래 이름을 불러주니까 하쿠는 마법에서 풀려나고 강의 신 코하쿠로 돌아옵니다. 그런 얘기를 행방불명 씨가 DM으로 보내는데 일리가 있더라고요. 우리 모두는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산다, 정체성에 맞는 이름을 찾는 과정이 삶이다, 그전까지 모두는 행방불명의 상태다, 뭐 그런 메시지였어요. 그래서 우리 채널에 관심을 갖게 되었대요. 특히 자기 행방을 찾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후회란 녀석을 존중하기 때문에 이불킥 콘텐츠에 꽂혔다나…….”
꿈보다 해몽이었다. 분명 주작의 환심을 사기 위한 수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질투심을 걷어내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의 해석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오명 세탁소’와 ‘주작 라디오 이불킥’의 취지를 정확히 표현한 것 같기도 했다. 김춘수의 ‘꽃’을 소환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가꾸며 산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불리며 살기를 원하고,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호명되길 바라며 산다. 때로는 비난과 원망과 저주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다시 깨끗하게 불리길 희망한다.
그날 나는 내 이름 정지강을 다시 생각했다. 피디라는 수식어를 달고 산 지 13년. 나의 정체성은 무얼까? 안정희구의 우물 안 개구리인가, 온실 밖 야생이 어울리는 모험가인가? 물론 우리 채널의 성공은 정지강이라는 이름을 빛내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보다 수입은 5배 이상 늘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환호와 은행 계좌의 잔고가 내 정체성이라 할 수 있을까? ‘강에 이른다’는 내 이름의 뜻은 무엇을 의미할까? 강의 신 코하쿠처럼 오래전에 잊은 기억 탓에 가짜 정체성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불명확한 것이 나 자신의 행방인 것 같아 나는 심란해졌다. 주승아에 대한 생각도 깊어져 그날 밤 나는 노트에 이런 시 한 편을 끼적였다.
<관계>
밀었다 당겼다 하는 것
그래서 멀었다 가깝다 하는 것
지겨웠다 설레었다 하는 것
시들었다 꽃피었다 하는 것
하지만 아예 사라지진 않는 것
손 닿는 범위 안에 있는 것
호명의 반경 안에 머무는 것
“출연 신청한 메일 중에 공익제보자가 있어요. 난 땡기는데 형님하고 주작은 의견이 어떤지 말씀해 주세요.”
기획회의에서 내가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저도 이메일 읽었어요. 종합병원의 간호사인데 제약업체 리베이트 관행을 폭로했던데요? 병원 차원에서 부당한 거래를 주고받았다고. 익명으로 신고를 했는데 이름과 신상이 알려지면서 엄청 비난을 받고 있네요. 거의 왕따 수준으로.”
승아가 정보를 덧붙였다.
“말이 좋아 공익제보에 양심선언이지, 정황이 뚜렷하지 않으면 내부고발자인 셈이잖아. 신중하게 섭외해야 되지 않을까? 요새 순수한 의도라는 게 있나 싶기도 하고 말이야.”
섭외에 대해서 그동안 공운은 별다른 의견이 없었는데 의외였다.
“그렇긴 하죠. 사익이 조금이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공익제보는 없겠죠. 그래도 내용을 보니 의약품 리베이트 관행이 있었던 건 사실이고, 폭로 이후에 원치 않는 피해를 당하고 있는 것도 팩트 같으니까 해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승아 씨가 통화 한번 해 줘요. 한번 만나보고 출연은 그다음에 결정합시다.”
오랫동안 나는 공익제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 동창의 부탁으로 ‘옐로카드 재단’이라는 시민단체에도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 공익신고, 공익제보를 받고 그 신고자를 보호해 주는 일을 하는 단체다. 사회의 불의와 부정을 바로잡기 위해 용기를 낸 사람을 옹호해 준다. 소속되어 있던 수사기관의 불법을 폭로한 검찰 수사관, 엔진 결함과 리콜 묵살을 폭로한 자동차 회사 연구원, 자살한 장병의 구타 사실을 폭로한 군 간부 등을 도왔다.
10년 넘게 후원금을 보내고는 있지만 초대받은 총회나 세미나에 참석한 적은 없었다. 손지향 간호사의 출연 신청에 나는 아차 싶었다. 이미지가 더러워진 사례 중에 가장 억울한 일이라면 당연히 공익제보일 것이다. 공익제보자를 오명 세탁소에 출연시킬 생각을 왜 못했을까 싶었던 것이다.
승아와 나는 손지향 간호사를 만나러 갔다. 그녀는 경기도 부천의 한 대형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교대시간인 오후 4시에 병원 근처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송 간호사는 옅은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얼굴은 하얬고 그래서 그런지 입술은 더 붉어 보였다. 표정도 밝아 보였다. 간호사 복장이 아니어서 그런지 길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20대 후반의 여자 같았다. 기다리고 있던 우리는 일어나 인사했다.
“봄 나비처럼 아름답고 화사하시네요. 지금은 여름이지만요, 하하.”
승아가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을 건넸다. 나라면 비웃음으로 들었을 텐데 손지향 간호사는 칭찬으로 여기는 듯했다.
“고맙습니다. 멀리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감사하고 귀하신 분들 오시는데 대충 하고 나올 수는 없잖아요. 신경 좀 썼어요, 하하.”
원하는 메뉴를 묻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아이스카페모카 투샷에 시럽은 적당히요’라고 말했다. 주문하러 가려고 승아가 일어났는데도 그녀는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마치 자기 재능을 뽐낼 심산에 설레며 오디션을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그녀는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는데 원래 웃는 상이어서인지, 자신의 상황을 잊었기 때문인지 헷갈렸다.
“간호사님, 많이 힘드시겠어요. 용기를 내서 공익제보를 하신 건데……. 병원 내에서 말들이 많죠?”
“네. 힘들어도 버텨야죠. 그래도 옐로카드 재단에서 많이 도와주고 계세요.”
역시 이 건에도 옐로카드 재단이 관여하고 있었다. 힘들게 버틴다는 말과 달리 그녀의 표정은 잔뜩 상기돼 있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머릿속에 두 글자가 떠올라 미팅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관종’. 내게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은 관심종자였다.
“저희 병원은요, 대학병원은 아니지만 꽤 규모가 큰 상급병원이거든요. 그런데도 제약회사랑 리베이트 거래를 해요. 제가 폭로한 이후에는 쉬쉬하면서 조심하는 척하지만요.”
“어떤 식으로 리베이트 거래를 했는지 얘기해 주실래요?”
아이 달래듯 승아가 친절하게 요청했다. 송 간호사는 정말 어린애처럼 해맑았다. 카페 안에서는 헨델의 오라토리오 ‘울게 하소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김이 샜다. 울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거라 예상했던 사람이 도리어 밝게 웃고 있다.
“크게 보면 랜딩비, 알값, 세미나 3가지 방식이에요. 랜딩비라는 건 제약회사가 신약을 출시하면 처방할 수 있는 약품 목록에 올리는 대가로 받는 돈이에요. 약심위라 부르는 약제심사위원회에서 처방 가능한지 아닌지를 결정해요. 병원이나 소속 의사들이 처방 가능 결정이 나도록 힘을 써 주면 회사가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 알값은 처방 횟수에 비례해서 주는 돈이에요. 우리 병원에서 한 달에 어떤 약을 100번 처방했다면 그만큼의 돈을 주죠. 세미나는 말이 좋아 세미나지, 한 마디로 여행시켜 주는 겁니다. 국내든 해외든 선생님들이나 원무과 고위직들을 초대해서 먹고 놀게 해주는 거예요. 발표 안 하는데도 발표비도 쥐어주고요. 뭐랄까, 의사들 관리비 같은 개념이죠.”
송 간호사는 포부가 넘치는 전교 어린이 회장처럼 조리 있게 말했다. 여러 번 얘기해서 외우다시피 했을 것이다. 그녀는 의료계에 팽배한 관행을 보건복지부 온라인 게시판에 올렸었다. 본인이 보고 들은 구체적인 사례와 금액, 횟수를 특정해서 썼기 때문에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중에는 국회 보건복지위의 야당 의원도 있었고, 그녀가 정부를 상대로 실태 조사를 요구하면서 의료계가 발칵 뒤집혔다. 두 달 전의 일이었다.
“병원은 그 돈을 어떻게 쓰나요?”
아이스카페모카를 마시는 송 간호사를 보며 내가 물었다.
“그거는 잘 모르겠어요. 공식적인 매출이 아니니까 비자금으로 만들어 놓지 않을까요?”
여전히 천진난만했다. 잔뜩 긴장한 채로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는 손지향 간호사를 예상하고 나왔는데 의외였다. 그러고 보니 만나고 있는 카페도 병원과 불과 한 블록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만나자고 했을 터였다.
“처음 관행을 폭로한 정부의 온라인 게시판은 익명인데 간호사님 이름이 어떻게 알려지게 됐을까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 했다. 승아가 신상 노출 경위를 물었다.
“글쎄요. 옐로카드 재단에서도 물어보셨는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병원 사람이나 가족이나 누구한테도 저는 말 안 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기사가 뜬 거예요. 제 이름은 아니지만 우리 병원 이름하고 근무 병동까지요. 그러자 병원이 난리가 났어요. 병동까지 알려지면 수색은 금방이거든요. 지금 근무하고 있는 심뇌혈관 병동 간호사라고 해봐야 저까지 모두 10명인데……. 진상조사위인가를 만들어서 한 명씩 취조했는데 저도 불려 갔어요.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죠.”
울면서 억울해할 말을 그녀는 태연하게 내뱉었다. 멘탈이 강한 걸까, 개념이 없는 걸까?
“그뒤로 병원이 주도했는지 사주했는지 몰라도 온갖 인터넷 게시판, 특히 의료인들 포털에 제 신상이 까발려졌어요. 거기에 또 댓글이 수백 개씩 달리고. 저는 한순간에 몸담은 조직을 배신한 죽일 년이 됐죠, 뭐.”
“왜 저희 채널에 나오고 싶어 하시는 거예요? 더 힘들어지실 수도 있는데…….”
내가 묻자 송 간호사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기왕 나쁜 간호사로 찍혔으니까 더 잃을 게 없어서요. 얻을 거라면 글쎄요, 유명세라고 해야 되나? 호호.”
공익제보의 모범답안을 그녀에게서 들을 수는 없었다. 의료계의 비리 척결이라든가, 투명한 약제 거래 시스템, 합리적인 병원 운영 같은 말은 손지향 간호사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몇 년 전에 입사 동기가 제약회사의 리베이트 관행을 고발하는 시사 프로그램을 연출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점심 자리에서 그의 푸념을 들었다.
“다른 사람 뒤를 캐 까발리는 거 이제 지겹다. 나도 너처럼 교양국으로 가고 싶어. 얼마나 우아하고 좋으냐? 시사제작국은 괴사제작국 같다. 긴장감에 온몸과 온 마음이 썩어 들어가는 것 같아.”
“왜 또, 뭐 어려운 아이템 떨어졌어?”
민감하고 핫한 아이템을 다루며 스릴과 성취감을 느끼는 시사 피디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동기 피디는 달랐다. 그의 푸념에 나는 졸지에 여유로운 피디가 되어 위로를 건네야 했다.
“제약회사 리베이트 관행을 파란다. 제보가 적어 막막하기도 한데 더 짜증 나는 건 병원들의 압박이야. 촬영 섭외 전화 한번 했을 뿐인데 방송에 자기네 병원 이름이나 건물 모습이 나가기만 하면 죽여 버리겠대. 조폭이 따로 없다니까. 난 의료인들이 문명인인 줄 알았는데 아닌 걸 이번에 알게 됐어. 공익제보자들도 섭외 연락하면 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쏙 들어가 버린다니까.”
짐작컨대 70분짜리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적어도 제보가 5건 이상은 되어야 한다. 이들의 증언에서 시작해 계속 파헤쳐야 뭐라도 잡힌다. 충분한 제보가 없으면 전문가 대담 수준의 지루한 흐름이 되고 만다. 당시 동기는 어찌어찌 힘들게 방송을 내긴 했는데 그다지 반향이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곡을 찌르는 킬러-핵심 메시지나 충격적인 정보-가 없었던 모양이다.
손지향 간호사와의 미팅에서 돌아와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오명 세탁소가 시사고발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공익제보로 오명을 뒤집어쓴 사람치고 손지향은 너무 가벼웠다. 최소한의 대의명분조차 얻기 힘들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다고 포기하자니 아쉬운 마음도 컸다. 당시 우리는 출연자 섭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게스트가 없어서가 아니라 뻔해서였다. 다들 엇비슷한 사연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고, 공익제보로 피해를 입은 사례가 계속 미련을 갖게 했던 것이다.
주저하던 내가 손지향의 출연을 결심한 시점은 미팅 후 한 달쯤 지나서였다. 그녀는 내게 안부를 묻는다며 문자를 보냈는데 거기에는 기사 링크가 연동돼 있었다. 열어 보니 이랬다.
<제약업계 리베이트 폭로한 간호사 검찰 소환>
경기 부천의 한 대형병원 소속으로 제약회사와 병원 간의 불법 리베이트 거래를 폭로한 A 모 간호사가 검찰 수사를 받게 됐다. 오늘 경기서부지검은 형법 제314조에 따른 업무방해 혐의로 A 씨를 불구속입건 했다고 밝혔다. A 씨는 세 달 전 소속병원의 의사 및 경영진과 제약회사 네 곳 간의 구체적인 리베이트 거래 정황을 보건복지부 온라인 게시판에 폭로한 바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 박민아 의원이 정부에 진상 조사를 요구하면서 파장은 커졌고, 이 과정에서 신상이 공개되면서 A 씨는 시민들의 응원을 받아왔다. 검찰 관계자는 “A 씨가 순수한 동기에서 불법 리베이트 관행을 공익제보한 것이 아니라 소속 병원과 갈등 및 경쟁 관계에 있는 B병원의 사주 때문에 내부고발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한 검찰은 이 과정에서 B병원이 A 씨에게 이직 및 처우 개선을 제안했다고 보고 수사를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약사 출신인 박민아 의원 역시 이 같은 폭로 정황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향후 검찰 수사가 어느 범위까지 확대될지 주목된다. 일각에서는 박 의원이 적어도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될 거라는 예측이 나온다. 검찰 수사의 범위와 방향에 따라 이 사건은 의료계뿐만 아니라 정계에도 적지 않은 파장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자신이 수사를 받게 된 기사를 보란 듯이 공유하는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싶어 나는 잠시 난감했다. 게다가 경쟁 병원의 사주를 받고 꾸민 일이라니 놀랍기도, 한심하기도 했다. 정치인의 개입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을까? 취재기자나 시사 피디가 아닌데도 나는 자꾸 파헤쳐 보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남의 뒤를 캐는 데 지친 동기 피디와 반대의 상황이랄까? 한 달 동안 망설였던 손지향의 출연도 그 순간 확신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주작, 손지향 씨 출연 날짜 잡아요. 박민아 의원도 같이 출연하는 걸로, 최대한 빨리.”
기획회의 시간에 내가 말하자 다들 눈이 커졌다.
“검찰 수사받는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리 핫한 이슈라고 해도 수사 피의자인데 괜찮겠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공유가 말했다.
“차리리 잘 됐어요. 그동안 망설였던 건 공익제보와 송 간호사의 캐릭터가 너무 안 맞아서였거든요. 검찰이 업무방해죄로 수사한다니까 얘깃거리가 더 많아지겠죠. 내부고발자의 뒷얘기라면 더 흥미로울 것 같아요. 게다가 정치인도 연루됐으니 화제성도 커졌고.”
“피의자 신분인데 우리 채널에 나와서 떠들어도 괜찮은 거예요?”
승아가 우려를 보탰다.
“수사받는다는 걸 핑계로 노코멘트하는 정치인들을 너무 많이 봤구먼. 우리 채널에서 한 말이 수사에 활용될 수는 있겠지만 원칙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어요. 본인만 승낙한다면. 국회의원도 마찬가지고.”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공운과 주작에게 내가 덧붙였다.
“관종 끼 있는 간호사와 인지도 높여야 하는 초선 비례 국회의원이 안 나올 리 없겠죠. 공익제보와 검찰 수사라는 대화 주제는 무겁지만 패널들의 캐릭터 자체가 흥미로워서 충분히 재미있게 나올 거 같아요. 해 보죠.”
촬영은 일주일 뒤에 잡혔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승아가 너무 많은 자료를 찾길래 내가 제지했다. 지나치게 깊게 들어갈 이유가 없고, 촬영 현장에서의 즉흥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꺼내야 할 화제의 얼개 정도만 짜놓기로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촬영이 우리 채널의 운명을 결정지을 거라는 생각을 나는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