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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리 피디 Apr 09. 2023

추레해지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실시간 유럽 수학여행기 11


시드니에서 온 이안의 코골이 소리에 조금 전 잠을 깼다. 사실은 깼더니 저애가 코를 골고 있는 거다(자책은 하지 말아라). 지금까지 4박을 했는데 늘 6시 전에 눈이 떠진다. 파리는 게으름뱅이도 눈뜨게 한다. 내 숙소는 생마르텡 운하 옆에 있다. 여기는 서울로 치면 중랑천 옆 상계동 쯤 되는 것 같다. 센느의 지류인 생마르텡 카날을 따라 허름한 게스트하우스들이 늘어서 있다.

운하 수로를 따라 공원이 있는데 남자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구슬이 정말 커 놀랐다

이곳이 얼마나 엉성한 숙소인지 적어 둬야겠다. 일단 호텔이 아니므로 룸서비스나 비품 같은 걸 기대할 수 없다. 엘리베이터도 고장이라 3층(실은 4층)까지 짐 나르는 것이 버거웠다. 방 침대는 12개(이제 보니 이층침대 6개다), 작은 테이블과 의자, 작은 세면대가 방 인테리어의 전부다. TV는 없다. 씻기와 싸기를 겸하는 욕실은 층에 하나씩 있는데 써금써금하다(형편없다는 뜻의 충청도 사투리). 드라이기도 당연히 없다. 강바람이 말려준다. 여러가지 면에서 쾌적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장사가 잘 된다. 싸기 때문일 거다(1박에 7~8만원 쯤?).

숙소와 같이 운영되는 펍. 어제는 메시와 음바페가 속해있는 생제르맹의 경기를 중계해줬다

잠시 후면 짐을 챙겨 북역 근처의 다른 게스트하우스로 이사 가야 한다. 지금까지는 만족이다. 나홀로 뚜벅이 여행이라지만 호텔 1인실에 묵었다면 결코 누릴 수 없는 재미가 있다. 하루새 룸메들 구성이 싹 바뀌었다. 중국, 브라질, 모로코가 떠나고 체코 애들 넷이 와 있었다. 남자 하나에 여자 셋인데 남녀 커플에 여자애의 언니와 여동생이다. 영어를 못하는 세 자매는 자기들끼리 엄청 깔깔거리며 웃었다. 남자애가 더듬더듬 영어 대화가 되는 수준이었다. 얘는 체코에서 독일까지 장거리 출퇴근을 한다. 그저께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밤새 차를 몰고 프랑스로 왔단다. 30시간이나 못 잔 것이다. 여친과 그의 자매들에 대한 헌신이 대단한 듯.


우리가 프라하의 아름다움과 슬로바키아 분리 역사에 대해 떠들고 있을 때 인도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아프리카 흑인처럼 새카만 것이 예상대로 남부 출신이다. 뭄바이? 물었더니 남쪽 끝인데 모를 거란다. 그래, 몰라도 된다. 매우 유창하고 정확한 영어로 자기가 군인이라고 소개했다. 잉? 휴가인지 출장인지 군인이 여길 왜?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대신 세얼간이, RRR 등 내가 최애하는 인도 영화에 대해 따봉을 날려줬다. 그는 국뽕이 차오르는 것 같진 않았고 다소 시크하게 인도가 영화를 잘 만들긴 하지,라고 어깨를 으쓱하며 인정했다.


첫날부터 있었지만 관광에 집중하느라 방에선 겉돌던 백인 남자는 이안이다. 이 안에서는 가장 외모가 출중한 듯. 얘는 비틀즈의 존 레논을 닮았다.  전날과는 달리 어젯밤 어젯방은 매우 시끄러웠다. 체코 여자애들은 깔깔거리지, 인도 녀석은 호주에게 코알라의 먹이에 대해 묻고 체코 남자는 나에게 기생충(기생춤이라 썼다가 다행히 수정함)과 BTS에 대한 팬심을 말했다. 나는 존 레논에게 호주의 토끼 문제는 어떻냐고 물어 한숨을 얻어냈다(거의 재난상황이다!). 다시 나는 외국어 학습앱인 듀오링고를 열어 체코말을 시연함으로써 대화에 못 끼는 여자애들을 배려했다. 두서없고 유쾌한 밤이었다.


생각여행의 본질은 기간이 어떻든 그곳 사람과 비슷하게 살아보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패키지투어는 권하고 싶지 않다. 전세버스와 호텔, 관광지에 갇히는 셈이다. 하지만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파리지엥을 관찰하게 된다. 부딪히며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게 된다. 그러고 있으면 어떻게 사는가, 무슨 생각을 하는가를 짐작하는 지경에 이른다(다음 편에서 멋지게 살지만 멋대로 사는 파리지엥에 대해 정리하겠다). 물론 그 호기심을 다 충족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패키지보다는 낫다고 믿는다. 많은 한국인들이 수줍음을 타고 염려가 큰 탓에 안전한 여행을 추구한다. 하지만 여행은 모험 아닌가? 범죄나 테러, 소매치기가 걱정되면 침대에서 나오지 않아야 한다. 말이 어눌해도 손발짓이나 파파고가 있다. 걱정은 대비하고 마음은 개방해야 한다. 기왕 여행할 거라면 같은 소중한 시간에 더 많은 경험이 가능한 방식을 택하는 게 낫지 않을까?

개선문 옥상에 올라가 사진을 찍고 있는데 웬 말레이시아 청년 하나가 다가와 자기도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귀엽다면서..

자유여행의 가장 큰 단점이라면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 깃발 든 가이드가 데리고 다니면서 좋은 설명을 해주는데 혼자서는 어렵다. 미리 공부를 해야 한다. 책이나 유튜브로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요새는 고퀄의 오디오 가이드북이 있어 그걸 구매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몇 번의 단체 깃발관광을 다녀봤지만 가이드의 설명은 단 한 마디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다. 물론 당시에는 도움이 되었겠지만 미리 스스로 학습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빠르게 사라진다. 팔짱 낀 채 일타강사의 특강을 들었다고 시험 성적이 좋은 건 아니다. 자발성과 적극성이 만족도를 높여주는 법이다.


어제 오르세 미술관을 가는 버스에서 한국인 부부를 만났다. 60 전후의 중년이었는데 110일 예정으로 여행하고 있단다. 알고 보니 나랑 같은 날 들어왔다(항공편은 달라서 가방 문제는 없던 분들이다). 프랑스가 첫 스타트란다. 파리 여행 후에는 남불, 스페인 산티아고, 모로코 카사블랑카, 포투투갈 어디어디, 덴마크 어쩌구저쩌구, 내가 모르는 지명들이 열거됐다. 대단하시다고 말했더니 나한테도 칭찬이 돌아왔다. 그런데 내 칭찬이 아니고 떠나 보내준 가족과 직장 칭찬이었다. 관계자 여러분, 이 글을 빌려 칭찬을 전해드립니다. 나이 탓, 여건 탓 대신 유쾌하게 과감하게 짐을 꾸렸을 것이다. 마지막이다 싶어 큰 마음을 잡쉈다는데 마지막이 아니길 빌어드렸다. 사학년 중반 딱한번이란 내 여행 타이틀도 틀리길 바란다. 학년, 반이 바뀌면 번호도 여러번이면 좋겠다. 


이제 슬슬 나서야겠다. 순교자의 언덕이라는 몽마르트르에 올라 성심성당(사크르 르)에서 부활절 미사를 참관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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