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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리 피디 Apr 10. 2023

죽음과 함께 사는 나라

실시간 유럽 수학여행기 13


새 숙소는 더 낫다. 제너레이터라는 이름인데 알고 보니 큰 도시마다 다 있는 게스트하우스 체인이다.

"3박이지?"

어제저녁 체크인 상황. 숙소 직원은 젊은 남자였는데 제임스 므라즈를 닮았다. 노래를 시켜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니, 2박인데"

 가방 분실 사건 이후로 상대 실수에 대한 예민함이 늘었던 모양이다.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앗, 미안. 2박 예약 맞네"

"깜짝 놀랐잖아. 순간 착각했네. 화요일에 런던으로 갈 건데 거기서도 숙소가 제너레이터거든. 거긴 3박 맞아."

"아, 그래?"

"너네 파리, 런던 말고도 더 있니?"

내가 묻자 므라즈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자기네 글로벌 체인점들을 자랑했다. 나는 여기가 호스텔계의 맥도날드인지도 모르고 햄버거를 예약했던 것이다.

과연 숙소는 지난 녀석보다 낫다.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8인실인데 개별 커튼은 없지만(코골이도 못 막아주는 무용지물!) 방 안에 욕실과 화장실이 있어 편하다(물론 각 1인씩만 쓸 수 있다). 씻기와 싸기는 분리다. 크리스토퍼가 시골이었다면 이 발전기-제너레이터)는 도회적이다.

새벽에 누가 들어와 깼다. 시계를 보니 2시 반. 잔뜩 놀다 들어온 여자애 같았다(지금은 내 위층에서  죽어있다). 덕분에 잠이 달아나 오랜만에 두 시간 정도 브런치 서핑을 했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 에헤야~~ 떠나간 윌슨도 찾은 몸, 어떤 상황이든 못 참을까.

내 새 보금자리다. 전기를 충분히 생산해 주면 좋겠다. 감전은 사양

룸메들에 대해서는 특기할만한 것이 별로 없다. 근처 중국집에서 새우볶음밥(그저 그랬다)을 먹고 들어와 씻은 후 기욤 뮈소 소설을 읽고 있자니 차례로 남자 둘이 들어왔다. 영국에서 영어를 배우고 귀국 전 대륙 여행 중인 브라질인, 남아공 케이프타운 출신인데 지금은 독일 함부르크 근처 시골 마을에서 유치원 교사를 하고 있는 녀석 등이다. 언제 왔니, 언제 어디로 가니, 오늘 어땠니, 내일은 뭐 하니 따위의, 이제는 자면서도 읊을 것 같은 대화가 오갔다. 둘은 전날 인사해서 서로 아는 사이 같다.


아, 남아공한테서 유용한 정보를 얻었다. 내 가방 고생담을 얘기했더니 보상을 받으란다. 구황제품 영수증을 항공사 이메일로 보내면 입금해 준댄다. 유럽에서는 흔한 일이고 심지어 이런 일도 있단다. 1. 여행가방 쌀 때 옷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사진을 찍은 뒤 빼놓고 출발한다. 2. 만약 나처럼 짐을 분실하는 '행운'이 벌어지면 새 맥북을 산 뒤 나중에 청구한다. 3. 항공사에서 돈을 받으면 (짐을 끝내 못 찾더라도) 새 컴퓨터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다. 찾더라도 규정상 가방을 뒤질 수도 없으니 항공사 입장에서는 증명사진을 믿고 상해 주는 수밖에 없다. 분실 직후 얼씨구나 하며 백화점으로 달려가 옷과 가방을 사기도 한단다(한도가 5000유로, 750만 원인 것은 주의). 내가 지금 여행 가이드북을 쓰고 있나?--;

"나도 대비 차원에서 항상 그렇게 하는데 아직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어."

그게 다행일까 불행일까? 스스로 개발하고 가입하는 보험인데 부정직한 함정 같기도 하다. 정직만이 베스트 웨이라고 이 영악한 녀석아! 네가 가르치는 유딩들이 뭘 배우겠니?라는 말을 차마 입 밖에 내진 않았다. 그러면서 오호 거 좋은 아이디어인데? 라며 다음번에 써먹을 생각을 하는 나 역시 속물이다.

어제 몽마르트르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만드는' 공사를 목격했다. 고치는 공사만 있는 줄

내일 아침엔 일찍 유로스타를 타고 런던으로 가야 하므로 오늘이 내겐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마레 지구를 갈 거다. 서울로 치면 강남. 화려한 쇼핑과 현대미술, 유명한 레스토랑 들은 내 알 바 아니고, 흔적도 안 남은 바스티유 자리가 메인이다. 세계사 교과서에 삽화가 있었다. 분노한 파리지엥들이 습격했다는 바스티유 감옥. 겨우 7명의 수감자들이 있었단다. 어린 나는 바스티유와 베르사유를 늘 헷갈렸다. 분노한 시민이 공격하기로는 궁전이 더 어울리지 않나? 감옥이라면 습격한 이유는 구출할 투사가 있었나? (이래서 스토리 없는, 궁금증 해결 안 해주는 역사 교육이 문제입니다) 사실 베르사유에는 무기가 있었단다. 그런데 총알은 없었다. 그래서 시민들은 또 센강을 건너 총알이 있는 생제르맹 데 프레 성당을 털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과격한 인간들...

개선문 아래 묻힌 이름 없는 군인들을 위한 비문. 추념식을 보니 내 나라도 아닌데 울컥하게 된다

불란서인들은 역사에 올인하는 느낌이다. 정부는 죽은 자들의 추모에 돈와 국력은 쏟고 국민들은 악착같이 달려들어 묵념과 학습을 한다. 죽은 예수를 기리는 성당이 이미 수백 개다. 개선문 아래엔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죽은 무명용사들을 묻었는데 매일 저녁 추념식을 한다. 운 좋게 나는 입장 대기 중에 엄수 장면을 코앞에서 보았다. 역대 왕들은 생드니 성당에, 주로 문인과 예술가 들은 몽마르트르 공동묘지에, 그 밖에도 시와 정부가 관리하는 묘지가 여러 개 있다. 팡테옹은 또 어떤가? 마블 영웅들만 모셨다. Viva la France!

팡테옹에서 볼테르에 대해 공부하는 청소년들. 매우 적극적이고 진지한 태도에 놀랐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라틴어 격언이 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늘 두려운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터부시 한다. 하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죽음과 동거하는 것 같다. 먼저 산(죽은) 사람들의 길을 쫓으며 어떻게 살지를 탐구한다. 나는 미래지향적인 걸 미덕으로 알고 살아왔다. 과거에 관심을 가질라 치면 시대착오적이라는 오명이 따라온다. 하지만 이제 보니 뭔가 길을 잘못 들었다고 느껴진다. 미래라는 그럴싸한 용어에는 실체가 없다. 당연히 가치도 없다. 그건 마치 허공에 대고 하품을 한 뒤 이게 바로 영원한 생명이야라고 우기는 꼴이다. 죽은 사람들에 집요한 집착을 갖는 프랑스가 내게 말해 주었다. 오래된 미래라는 말처럼 돌아보려고 하지 않으면 내다보는 능력도 생기지 않는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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