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은 아무에게나 배울 수 없어요.
아이가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집을 다닐 때의 일이다. 학부모 참여 일정이 있는 날이었는데 나는 회사 일이 바빠서 남편이 나 대신 참석했다. 어린이집 아이들 다 같이 물놀이터에 갔다가 자연스럽게 부모님들과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였는데, 그날 나온 보호자 중에 아빠는 내 남편뿐이었다.
식사자리의 유일한 청일점이었던 남편은 그날 퇴근한 나에게 피곤한 하루였다고 말했다. 나는 남편이 자세한 내막을 말해주지 않아서 몰랐다. 다음날 퇴근길에 마주친 같은 어린이집 엄마가 어제 내 남편이 심문을 당해서 곤란해했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제야 나는 남편에게 무슨 일이 었었냐고 물었고 남편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상황설명을 들은 나는 속상해졌다.
평소에도 남편이 아이 등하원이나 하원 후 놀이터에서자주 놀아주던 터라, 단지 어린이집 엄마들과 자주 마주쳤었는데 다 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가 마련되니 남편에게 궁금한 게 많았던 것 같다. 엄마들이 남편에게 직업이 뭐냐, 와이프는 어디 있냐, 와이프는 무슨 일을 하냐, 왜 매일 아빠가 데리러 오냐. 등등 질문폭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날 그 자리에 나는 없었지만 몇 마디 말로 어떤 분위기였는지 알 수 있었다. 본인들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채우기 위해 무례한 질문들이 오갔을 것이다.
맞벌이인 집도 있고, 외벌이인 집도 있고, 조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도 있고, 이혼가정도 있듯 가정의 형태는 다양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외벌이 와이프" 가정은 신기해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한 질문을 던진다. 남편은 그럼 일을 안 해? 여자가 대단하다. 생활이 가능해? 얼마나 벌어? 등등..
물론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꾸리는 데 있어 경제적인 가치는 필수적이다. 돈은 무척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 돈, 꼭 아빠가 벌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남녀를 떠나 사람마다 더 잘하는 일이 있다. 각자 합의 하에 더 잘할 수 있는 일의 역할을 나눠서 한다면, 그리고 그 삶에 불만이 없고 구성원 모두가 만족한다면 그걸로 괜찮은 삶 아닐까?
결혼 전 남편의 꿈이 뭐냐고 물었을 때 남편은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내 꿈은 나만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고, "좋은 아빠"의 기준에 경제적인 능력도 물론 포함되겠지만 나는 그 외의 것들을 좀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나는 어릴 때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다정함을 알려줄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어릴 적 아빠와의 추억이 없다. 기억나지 않는다. 아빠가 필요한 순간에 나는 항상 혼자였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무수히 많은 상호작용을 통해 쌓인다.
아빠는 어릴 때 내 옆에 있어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다 큰 어른이 된 나는 아빠에게 아무 감정이 없다. 원망하는 마음도, 사랑하는 마음도 없다. 미워하는 마음이라도 있다면 감정이라도 있다는 뜻일 텐데, 나는 정말로 아무 감정도 느낌도 없다.
그래서 나는 좋은 아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내 아이는 나처럼 자라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경제적인 조건보다는 나에게 필요한 기준을 가지고 내 남편을 선택했다.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 남편은 내가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도 가장 다정한 아빠다.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을 받는 아이를 보면서, 그리고 남편의 다정함을 배워 나 또한 아이에게 사랑을 주면서 나는 나 스스로를 많이 치유했다.
조급한 성격의 나와 달리, 남편은 느긋하고 섬세하다. 눈치 없는 나와 달리, 남편은 주변 사람의 기분이나 말의 속뜻까지 빠르게 파악한다. 내 남편의 섬세함과 다정함은 육아에서 십분 능력을 발휘한다.
아이는 자전거를 타는 법도, 그림을 그리는 법도 남편에게 배웠다. 우리 아이는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 당연하게 남편에게 달려간다. 우리 아이에게 아빠는 그리고 싶은 걸 다 그려주는 마술사다.
우리 아이는 부모상담을 하면 항상 또래에 비해 눈치도 빠르고 주변 친구들을 세심하게 챙길 줄 안다면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는 편인데, 우리 아이의 다정함은 자연스럽게 남편에게서 배운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아빠가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수록 아이의 정서조절 능력 향상은 물론, 사회성 발달에도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성격 급한 나와 달리 남편은 아이를 닦달하지 않는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다정하게 설명하고 가르친다. 아이의 속도에 맞춰 기다리고 재촉하지 않는다.
주말마다 아이가 태블릿으로 하는 다양한 게임들은 모두 남편이 알아보고 결제해서 깔아준 것들이다. 주말에도 내가 바쁠 때에는 아빠와 항상 키즈카페에 간다. 남편은 키즈카페에 가서도 혼자 쉬거나 지켜보는 법 없이 끊임없이 아이와 상호작용을 하며 놀아준다.
내가 회식이나 야근으로 늦게 들어오는 날에는 나 대신 마중 나간 아빠와 놀고, 아빠가 해 준 밥을 먹고, 씻고 장난을 치다가 아빠가 꾸며내는 똥꼬이야기를 들으며 잠에 든다. 남편은 아이가 했던 말이나 가지고 싶다는 물건들은 잊지 않는다. 용돈을 털어 인형 뽑기를 해서 아이 하원길에 깜짝 선물을 하기도 한다. 아이와 한 약속은 어떻게든 지키려고 항상 노력한다.
내 아이는 나와 다르게 여가시간을 아빠와 보내는 것이 당연하고, 커서는 아빠와 결혼하겠다는 약속도 한다. 내가 바쁘거나 여유가 없어 보이면 항상 아빠에게 달려간다. 나 몰래 아빠와 둘이 비밀약속을 속닥거리며 킬킬 웃기도 한다. 아이가 잠들면 남편은 아이 방에 몰래 들어와서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인사하고 뽀뽀하는 의식을 가진다. 늦은 밤, 아이를 바라보는 남편 눈은 이 세상에서 가장 따듯하다. 참 다정한 아빠다.
나는 훗날 아이가 커서 아빠를 떠올릴 때 아빠와 재미있게 웃고 떠들며 놀았던 추억들을 겹겹이 떠올리며 마음이 따듯하기를 바란다.
아빠를 통해 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기를 바란다. 아빠에게 받은 다정한 사랑이 마음 깊은 곳에 뿌리내려 험한 세상을 버티고 살아가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커서 아빠랑 결혼하겠다는 말이 씨가 되어, 아빠만큼 다정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내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빠에게 다정함을 배우고 있다. 사랑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빈 손으로 시작해 내 힘으로 하나하나 채워가는 이 삶, 나는 이 삶이 참 좋다. 뭐 하나 순탄한 것 없지만 나는 조금 부족하고 모자란 이 삶이 더없이 좋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완벽하다. 내 남편은, 내 아이에게 완벽한 아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