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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같은 애가 왜 우리 아들을 만나니?

조금은 특별한 한 집 아래 동거, 고부관계

by 현아

남편과 연애를 시작하고 한 달이 막 지났을 때, 당시 구남친(지금의 현 남편)은 나에게 부모님과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연인의 부모님을 만나는 자리는 처음은 아니었지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잔뜩 긴장한 채로 그 자리에 나갔던 것 같다.



무난한 파스타 집을 예약하고 약속 시간 전에 미리 나가 남편과 함께 앉아 있었다. 저 멀리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한 중년의 여성분이 다가오셨다. 노랗고 밝은 갈색의 머리와, 호피 블라우스와 붉은 립스틱을 바르신 내 미래 시어머니는 세련되고 화려했다. 언뜻 본 첫인상은 성격이 드셀 것 같았다. 자리에 앉아 나를 빤히 3초 정도 바라보신 시어머니의 첫마디는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어머, 너 같은 애가 왜 우리 아들을 만나니?"



엄마 아빠 몰래 밤늦게 사랑과 전쟁을 보던 유년시절의 기억이 남아서일까, 나는 그 한마디에 담긴 저의가 무엇인지 빠르게 두뇌회로를 돌렸다. 내가 마음에 안 드시나? 내가 부족하다는 뜻일까? 3초가 30분 같던 침묵 후에 시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정말 고마워요, 우리 아들 만나줘서 정말 고마워. 이렇게 예쁘고 똑똑한 아가씨가 우리 아들 같은 모지리를 만나줘서 너무 고마워."



뒷말을 듣고 팽팽하던 내 두뇌회전이 멈췄다.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씰룩였다. 그간 사랑과 전쟁을 보면서 쌓아 온 "시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오빠를 칭찬했고, 시어머니는 아들의 흠결을 스스럼없이 언급하셨다.



"우리 아들이 어릴 때부터 심부름시키면 항상 뭐 하나씩 빼먹어 오고, 낯도 가리고 성격도 소심해서, 사회생활 하고 나서도 항상 퇴근하고 오면 사람도 안 만나고 집에만 혼자 누워있고 해서 이놈의 자식이 장가는 갈 수 있으려나, 사람 구실은 하려나 항상 걱정했는데. 야무지고 참한 아가씨를 데려왔네. 너무 고마워. 우리 아들 만나줘서 고마워요."



뒤따라 들어오신 시아버지도 나를 보고 고맙다며, 혹시 더 먹고 싶은 것은 없냐고 여쭤보셨다. 처음 만난 어른들이지만 나는 남편의 부모님들에게서 친숙함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이 사람들의 가족이 되겠구나 하고 어렴풋이 미래를 느꼈다.



연애한 지 한 달 차에 남편의 부모님을 만나 뵙고, 두 달 차에 남편은 나와 동거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시부모님은 선뜻 그러마 하고 전세 보증금을 보태주셨다.



우리는 신림 고시촌 투룸 빌라에서 작은 살림을 시작했다. 추운 겨울 이사를 했고, 시부모님은 우리를 위해 제일 좋은 온수매트도 선물해 주셨다.



남편은 퇴사와 재취업을 준비했고 우리는 여차저차 결혼식도 치렀다. 열심히 돈 모으라며 시부모님은 예물 예단도 생략하셨다. 그 덕에 결혼 준비가 수월했다. 결혼식 날 나의 친한 지인 언니가 사회자를 맡아주었고, 나는 남편을 위해 축가를 불렀다. 허니문 베이비도 생겼다. 신혼부부 특공으로 경쟁률 높은 청약에도 당첨되었다.



그야말로 탄탄대로였으나 문제가 생겼다. 출산을 앞두고 육아휴직을 해야 하는데 남편이 퇴사를 희망한 것이다. 말다툼이 오갔지만 남편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한 달 만에 살이 10kg 넘게 빠진 모습을 보고 나도 결국 남편의 퇴사에 동의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시어머님은 울면서 내게 미안하다고 하셨다. 우리 아들 때문에 남의 귀한 집 딸이 고생한다며 흐느끼셨다. 코로나 시즌과 맞물려 남편의 불안정한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나는 조기복직을 해야 했다.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상황이 되자 시부모님이 청약에 당첨된 집에 입주하기 전까지 합가를 제안하셨다. 말 그대로 시부모님의 집에 들어가 살며 생활비도 절약하고, 일해야 하는 나 대신 아이도 선뜻 봐주시겠다고 하셨다.


처음엔 합가라는 단어 자체에 거부감이 들었다. 인터넷에 시부모님과 합가 한다는 글을 검색하기만 해도 부정적인 사례들이 많이 보였다. 나도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웠고 한편으로는 내 잘못이 아닌데 왜 이런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나 싶어 화도 났다. 침착하게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고려한 끝에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가 돌이 될 무렵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시부모님의 집에 들어가 두 개의 방을 사용했다. 하나는 옷방이고 하나는 우리 가족의 침실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약 3년 정도 정말 가족이 되어 살았다. 걱정과 달리 나는 시부모님과 큰 문제없이 지냈다.



원래 알고 지낸 가족처럼 생활습관 같은 것들도 크게 부딪히는 것이 없었고 무엇보다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서 적당한 선을 두고 지냈기 때문이다. 시부모님이 나와 남편을 많이 배려해 주셨다. 육아방식에 대해서도 시부모님은 대체적으로 내 의견을 존중해 주셨다.


세대 간의 이해가 상충할 때도,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었다. 자연스럽게 이해가 밑바탕에 깔리니 한 집 아래 동거가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합가는 내게 숨통을 틔워 주기도 했다. 아이를 재우고 나서 시부모님께 아이를 부탁하고 남편과 손을 잡고 심야영화를 보러 갔던 날들도 있었고, 내 첫 해외여행이라며 크리스마스 연휴에 나와 남편 단둘이 삿포로 여행을 보내주시기도 했다. 여행 가서 먹고 싶은 것도 사 먹고, 사고 싶은 것도 사라면서 용돈도 쥐여주셨다. 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시부모님과 한 지붕 아래의 동거는 남들과 조금 다른 신혼 생활이었지만 되돌아보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아이는 나와 남편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포함한 어른들에게 차고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한 명의 아이가 자라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내 아이는 여러 사람과 상호작용하며 더 친화력 좋은 아이로 자랐다.



시아버지는 점잖으시고 표현이 서투르지만, 가끔 친우분들과 술을 드시고 오면 가장 먼저 내게 전화해서 우리 며느리 먹고 싶은 음식이 뭐니 물으시며 그걸 꼭 사 오셨다. 시아버지 손에 들린 건 피자 두 판이 되기도 했고, 치킨이 되기도 했으며, 아이스크림이 가득 담긴 한 봉지가 되기도 했다.



시어머니는 화려한 옷차림만큼이나 열린 사고의 멋쟁이 셔서 친구분들이 많다. 다같이 외식을 하거나 종종 길에서 마주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전생에 복이 많아서 우리 며느리를 만났어."라고 나를 자랑하신다. 우스갯소리로 남편에게는 "우리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잘한 건, 우리 며느리랑 결혼한 거야."라고 하신다.



가끔 시아버지가 나에게 "너네 엄마가 왜 저러냐~" 하며 시어머니 험담을 하면, 나는 "아버지, 죄송한데 제 엄마 아니세요." 하며 우스갯소리로 맞받아칠 정도로 이제 정말 나는 시부모님의 딸이 되어버렸다. 두 분은 항상 티격태격하시지만 어딜 가나 함께 다니시고, 내가 아는 한 가장 의리 있는 부부다.



내가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삶이 힘들 때마다 두 분은 남편과 함께 나를 지지해 주셨다. 돌 전 복직하며 아이의 첫걸음마를 보지 못해서 속상하다고 울자 시어머니는 아이가 첫걸음마를 떼는 모습, 첫 단어를 내뱉는 모습, 처음으로 혼자 밥을 떠먹는 모습을 모두 영상으로 찍어서 보내주셨다. 시어머니 덕분에 내 아이의 첫 순간을 나는 하나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여행과 나들이를 좋아하던 시어머니는 아이가 두 돌이 되기 전까지 나 대신 든든하게 아이를 돌봐주셨다. 내가 퇴근할 시간이 되면 놀이터에 아이와 마중을 나와 나를 반겨주셨다.



시아버지는 며느리 몸 축나면 안 된다며 아이가 안아달라고 떼쓰면 나 대신 아이를 안고 저만치 떨어져 한참이나 걸으셨다. 주말 아침 나보다 항상 일찍 일어나 온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셨다. 꼭두새벽 출근하던 시절 잠자리에 엄마가 없다는 걸 알아챈 아이가 대성통곡을 하면 시아버지가 항상 아이를 달래셨다.



두 분의 그늘 아래에서 나는 가족이 무엇인지 배웠고, 남편의 경제적 빈자리를 메꿨고, 우리 가족 스스로 자립할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3년 합가생활을 졸업한 지금은 남편과 나 아이 우리 셋이서 오순도순 살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시부모님과 만난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우리 집에 모여 삼겹살 파티를 하기도 하고, 날이 좋으면 다 함께 경치 좋은 곳으로 나들이를 떠나기도 한다.



시부모님은 항상 내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하시지만, 반대로 나는 내가 결혼을 결심한 남편의 다정함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기에 시부모님께 감사하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처럼, 내 남편은 시아버지의 다정함과 시어머니의 배려심을 꼭 빼닮았다.



시부모님을 지켜보며 나는 부족한 배우자, 부족한 자식을 어떻게 사랑으로 감싸 대해야 하는지 배웠다. 그건 한 지붕 아래 함께 살아봐야 배울 수 있는 것들이었다. 3년 간, 나는 사랑을 배웠다.


가족은 서로의 허물도 감싸며 서로의 빈 틈을 메꿔주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다. 대문 밖의 모든 것들에게서 시달리고 돌아와 집 문을 열면, 따듯한 온기로 나를 반겨주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내 쉼터다. 대문 밖을 열고 나가 버티고 싸울 수 있도록 내게 힘을 실어주는 구명 줄이기도 하다.


내가 선택한 가족, 이 가족 덕분에 나는 오늘도 당당하게 대문을 나선다. 세상에게 맞설 용기를 얻는다. 외벌이 와이프 에너지의 원천은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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