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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죽어서 무엇을 남기나

자가면역질환자의 고백

by 현아

이른 아침, 알람에 부스스한 눈을 뜨며 내 옆에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이를 바라본다.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면서 조심조심 침대에 일어나 화장실을 갔다가 부엌으로 간다. 컵에 쪼르르 정수기 물을 담고, 익숙하게 찬장을 열고 약을 꺼낸다.



위장보호제를 먹고, 면역 억제제 두 종류와 진통소염제, 스테로이드를 삼킨다. 최근 포도막염이 재발하면서 다시 스테로이드를 먹기 시작했다. 하루 두 번, 중증 난치성 질환을 겪고 있는 내가 12시간 간격으로 먹어야 하는 약들이다.



올해 초, 드디어 대학병원에서 긴 시간 고통받았던 내 병명을 알 수 있었다. 정형외과에서 피검사를 하고, 피검사 결과 양성이 나와 대학병원에 정밀 진단을 위해 진단서를 받아 진료를 의뢰했다. 운이 좋게 바로 다음날 대학병원 진료를 볼 수 있었고, 새해를 맞이함과 동시에 나는 국가에서 지정한 산정특례 대상자가 되었다.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인 강직성 척추염은 척추와 골반 관절에 염증이 생겨 점차 뻣뻣해지고 굳어지는 만성 염증성 질환이다. 완치는 불가능하고, 생물학적 제제 투약을 통해 일상생활의 불편함을 해소하며 살아가는 병이다. 이 염증은 척추나 관절이 아니더라도 내 몸에 전체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병을 알기 전에는 나는 5시간 이상 길게 잠에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등이 너무 아프고 불편해 자다 깨곤 했다. 가끔씩 걷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이를 악물고 절뚝이며 걸어 다닌 적도 있었다. 늘 그렇듯 내가 무리해서, 몸을 많이 움직여서, 자세가 나빠서라고 생각했다. 너무 어릴 때부터 몸을 혹사하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다녀서 그런가 싶었다.



엄마처럼 살지 말자고 분명 다짐했는데, 나는 나 자신에게 참 소홀했다. 삶이 벅찬 순간마다 나는 죽음을 상상했다. 늘 그렇듯 의연하게 버텨내지만 가끔 한 번씩 충동처럼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전부 내려놓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태어나지 않거나 돌로 태어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새로 태어나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



자가면역질환은 쉽게 말해,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외부의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공격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의 세포나 조직을 적으로 판단해 공격하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질병이다. 참 꼴이 좋다. 그토록 바라더니 생각한 대로 되어버렸다. 이젠 내 몸이 나 스스로를 공격한다.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더니, 모질게도 스스로를 괴롭히더니 결국 자가면역질환을 얻었다.



삶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마다 더 바쁘게, 더 힘들게, 더 정신없게 나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것 같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 틈이 없도록 일정을 빽빽하게 짜고, 할 일이 끝나면 바로 다음 일을 해치웠다. 차라리 정신없고 피곤해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도록, 내가 모든 걸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를 괴롭혔다.



아무것도 하기 싫으면서도 고장 난 이 몸을 이끌고 어떻게든 아등바등 약을 먹고 버텨내려는 내 꼴이, 악착같이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이 아이러니한 삶이, 대학병원 진단서에 표기된 내 병명으로 내 삶을 압축해 나타내는 듯했다.



피로가 쌓이거나 과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내 몸의 면역세포는 내 눈의 포도막염을 공격한다. 강직성 척추염에서 흔히 발생하는 합병증이다. 눈이 부시고 충혈되며, 시야가 뿌애지고, 심할 때는 한쪽 눈의 시야가 하얗게 제대로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포도막염이 올해만 벌써 네 번 넘게 재발했다. 이렇게 자주 재발하면 정말 영영 눈이 멀어버릴지도 모르는데, 내가 바라던 대로 되었는데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던 통증의 원인을 알게 되니 속이 후련하기도 했고, 내심 마음 한편이 씁쓸하기도 했다. 죽을병이 아니니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들었다. 제약이 생겨버리니 웃기게도 하고 싶은 게 더 많아졌다. 내 몸의 척추가 다 굳기 전에, 관절 마디마디가 굳어지기 전에 더 부지런히 세계 여행을 다녀야겠다는 결심도 들었다. 내가 늙고 아프다는 이유로 포기하게 될 것들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움켜쥐고 싶어졌다.



웃기게도 죽을병도 아닌 이 질병이, 나를 열심히 살게 한다. 정말로 눈이 뿌애져서 실명이 되어버릴까 봐 겁이 나서 내 아이의 모습을 간절히 눈에 담게 되고, 아이의 잠든 모습이 아까워 사진을 찍게 된다. 관절이 다 굳어서 가보고 싶은 곳에 가지 못할까 봐 틈틈이 가보고 싶은 세계 여행지를 알아보고, 유튜브로 여행 브이로그를 열심히 찾아보게 한다.



예전에는 무섭고 낯설어서 도전하지 않았던 일들도, 이제는 그냥 무작정 시작하고 본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일주일에 세 번은 헬스장에 가서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 유산소까지 야무지게 해낸다. 귀찮은 날이어도 아무 음식으로나 때우지 않고 나와 가족들을 위한 정성스러운 끼니를 차린다.



자가면역질환에 걸림으로써 나는 나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내 몸이 스스로를 공격해 정말로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지기 전에, 나는 나 자신에게서 나를 지켜내야 한다. 아프고 나니까 알겠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이 아직 더 많이 남았다는 걸, 아프니까 나는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더 간절하게 생각하고 절실하게 글을 써야 한다. 그걸 깨달으려고 나는 아팠나보다.



늦은 밤, 글을 쓰며 생각했다.


내가 만약 죽는다면 누가 나를 기억해 줄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나는 글을 남기고 싶다. 글 안에 다정함을 넣어, 사람과 사람의 마음에 내 글의 온기가 오래도록 남으면 좋겠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 사이에 내 온기가 영원토록 남아, 이 세상에 내 흔적이 남으면 좋겠다. 이 다정함이 누군가의 마음을 보듬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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