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함을 알려준 기억의 조각모음_3
첫 수능이 끝나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로 유명한 사이트들에 들어가서 집 근처 곳곳의 아르바이트 공고들을 보기 시작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첫 알바는 곱창집이었다. 멋모르고 집이랑 가깝고 시간대가 맞아서 지원했는데 하루 만에 잘렸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소중했던 첫 실패경험으로 남아있다.
연탄으로 곱창을 굽는 가게였는데 둥근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테이블마다 번호판이 붙어있었다. 20여 개가 넘는 테이블 번호를 다 외워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첫 아르바이트 치고 너무 서툴렀다. 내게 일을 가르쳐 주던 아르바이트생은 남자 대학생이었는데, 뜨겁고 무거운 연탄불을 꼬치로 꽂아 익숙하게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옮기며 틈틈이 휴대폰까지 확인하는 능숙함을 보였다.
연탄불이 너무 뜨겁고 무서웠고, 서빙 경험도 없었던 나는 너무 서툴렀다. 결국 아르바이트 첫날 회식을 하던 한 중년의 화이트칼라 남성분에게 물을 쏟아버렸다. 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연신 거듭 사과했고, 기분 좋게 술에 취하신 그분은 내게 괜찮다고 허허 웃어 보였다.
그리고 가게 문을 나서면서 나를 따로 불러 회사에서 받은 것 같은 과자 선물세트를 손에 들려주셨다. 우왕좌왕 서투르게 서빙하고 물을 쏟은 내게 과자 선물세트를 준 인상 좋은 아저씨. 그게 내 첫 아르바이트의 기억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날 하루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는 잘렸다. 사장님은 미안한 표정으로 같이 일을 하기엔 곱창집 일이 너무 내게 버거워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엄마 가게에서 일을 한 적도 있는데, 손님을 응대해 본 일이 없어서 나는 무조건 달달 제품에 대한 정보만 외웠다. 노부부가 매장을 찾아오셨고 나는 땀을 뻘뻘 흘리고 더듬거리며 1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제품에 대해 설명했다. 그냥 듣고 지나칠 수도 있고 귀찮았을 텐데도 그 부부는 내 말을 경청해 주셨고 선뜻 결제를 해주셨다.
사람을 대하는 일에 벽이 없어진 뒤로는 좀 더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들을 찾았다. 올리브영 판매원, 호텔 주방보조, 맥딜리버리 콜센터, 화장품 임상시험 아르바이트 등등. 아르바이트를 거듭할수록 나는 눈치가 빨라졌고 무슨 일이든 허둥대지 않고 차분하고 빠르게 쳐내는 법을 익혔고 일머리가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시간이 가장 빨리 갔던 호텔 주방보조 아르바이트에서는 멋진 파티시에 요리사분들을 만났다. 몰래 내게 먹을 간식을 챙겨주었고 오븐에 손이 데이면 자기가 다친 것 마냥 아파하면서 나를 걱정해 주셨다. 매일 아르바이트만 하던 나를 불러 따로 약속을 잡고 호텔 뷔페를 사주신적도 있었다. 일을 너무 잘한다며 정직원으로 들어오라는 과장님의 제안에는 앞길이 창창한 대학생한테 무슨 소리냐며 나 대신 강짜를 놔주시기도 했다.
공강이 있는 날이나 주말에는 어김없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했고 몸을 쓰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면 허리와 목이 너무 아파서 자꾸만 정형외과를 찾게 됐다. 시급이 높고 몸이 상대적으로 편한 아르바이트를 찾던 중, 국영수 중에 내가 가장 자신 있는 국어강사를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근거도 없이 국어강사와는 전혀 무관한 아르바이트 이력이 빽빽한 이력서를 들고 면접을 보러 학원에 찾아갔다. 원장 선생님은 영어를 직접 가르치는 분이었고 우리는 작은 교실에서 마주 보고 앉았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이력서를 건넸고 원장선생님은 내게 언제부터 일을 할 수 있냐고 물어보셨다.
아르바이트로 빽빽한 내 이력서를 보더니 내가 너무너무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학생은 오랜만에 봤다며 내가 너무 마음에 꼭 든다고 해주셨다. 근무시간과 시급 등을 협의하고 나는 바로 그다음 주부터 출근하게 되었다. 국어강사 일은 내게 너무 재미있고 잘 맞았다.
초등학생부터 고3까지 신나게 가르쳤다. 교육자료를 만들기 위해 구글링을 열심히 하고 각종 프린트 문제집을 찾기 위해 강사들 커뮤니티 카페에 가입하기도 했다. 아이들 성적이 올라서 기쁜 마음으로 사비를 털어 햄버거 배달을 시켜 먹기도 했다. 학원 강사 경험을 살려 과외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었다.
생존을 위해 비장한 마음으로 임했던 나날들에서 나는 문득, 사람들이 따듯하다고 느꼈다. 서투른 내게 과자 선물세트를 쥐어주며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원해 준 중년의 아저씨도, 누가 봐도 초짜처럼 보이는 내 말을 경청해 주고 물건을 구매해 준 노부부도, 작고 보잘것없는 주방보조였던 나를 따스하게 감싸주고 챙겨주셨던 요리사 언니들도, 강사 이력 하나 없는 나를 믿고 채용해 준 원장 선생님도 모두 내게 조금만 더 살아보라는 응원을 주었다.
죽을 만큼 힘들 것 같았던 순간들에 내게 숨통을 틔워 준 건 타인이었다. 그들은 내가 말하는 친절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따스함이 간절했던 그 시절의 나는 기억한다. 누군가의 친절이 누군가를 살게 한다. 그들은 모르겠지만 나를 살렸다. 훗날 어른이 되면 누군가의 부족함을 따스함으로 감싸주는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람이 죽어도, 따스함은 남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전한 온기는 영원히 마음 속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