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혼자가 익숙한 남자에게 무엇이든 함께 할 수 있는 든든한 여자가 나타났고, 항상 혼자 길을 걷던 여자에게 느리지만 하루에 한 걸음씩 함께 걸어줄 남자가 나타났다.
두 사람 모두 외로움을 스스로 견뎌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남자는 겉으론 부드럽지만 어떤 어려움도 의연하게 견디는 단단함이 있었고, 여자는 겉으론 무뚝뚝하고 강해 보였지만 작은 풍파에도 쉽게 숨죽여 우는 약한 성정이 있었다.
여자가 결혼을 결심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남자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였다. 흔한 대답처럼 유명한 유튜버가 되고 싶다거나 명예로운 직업을 가져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다거나,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여유롭게 살고 싶다고 대답할법한데 남자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대답을 듣고 이 사람이면 나는 좋은 가정을 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는 내 옆에서 같이 노력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드디어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와 함께 최고의 부모는 못되어도 최선을 다하는 부모가 되자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나 다음으로 내 아이를 가장 많이 이해하고 사랑하며 언제나 내 편을 들어줄 든든한 동반자를 만날 이 순간을 위해 나는 그동안 외로움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되기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며 매일매일 노력하겠다는 사람의 말을 듣고 나는 결혼을 결심했다.
그리고 우리는 평생 서로 인생의 모든 풍경을 함께하자는 약속을 모두에게 알렸고, 그 해 사랑의 결실이 선물처럼 생겨나 무럭무럭 자라났다. 딸이라고 했다.
처음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기쁜 마음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과연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내가 감히 그런 자격을 가져도 될까? 내가 누군가의 삶을 온전히 책임질 만큼 성숙한 어른이 되었는가를고민했다. 그러나 그 걱정과 별개로 아이를 품고, 그리고 아이를 낳는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하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뱃속에서 딸꾹질을 하고, 옆으로 누우면 불편한지 배를 발로 툭툭 차고, 큰 소리가 나면 깜짝 놀라 펄쩍 뛰는 태동을 실시간으로 느꼈던 임신기간은 인체의 신비의 연속이었다. 작은 생명이 내 몸에 항상 함께한다는 사실은 내게 안도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출산이 다가오자 예측 불가능한 상황은 피하고 싶어 적당한 날을 잡고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다. 코로나로 산부인과에 퇴원하기 전까지 실제로 아이를 만질 수 없었기 때문에 나와 남편은 면회실 유리 한 장을 두고 우리 아이를 처음으로 마주했다. 갓 태어나 핏물만 겨우 씻고 아직도 태지가 남은 아기는 동그랗고 뽀얀 얼굴로 쌔근쌔근 잠자고 있었다.
그 최초의 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이게 내 아이구나. 줄곧 내 뱃속에서 존재감을 나타내던 존재를 밖에서 만나게 된 나의 감상은 영화 아가씨에 나왔던 이 대사보다 적절한 표현은 없었다. 이 작은 생명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을까. 나 홀로 서있던 세상이 세 사람의 세상으로 넓어진 만큼 내 인생이 얼마나 풍파에 흔들릴지 걱정도 했었던 것 같다. 내가 이 아이에게 올바른 사랑을 줄 수 있을까. 나는 좋은 부모를 보고 자라지 못했는데. 감히나 같은 사람이 부모가 되어도 괜찮을까.
그러나 그건 바보 같은 걱정이었다. 산부인과와 조리원을 지나 집에 온 나와 남편은 태어나 처음 마주한 존재와 금세 사랑에 빠졌다. 육아는 치열했지만 일 분 일 초 작은 아기가 쑥쑥 자라나는 광경은 놀라움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태어난 지 100여 일 된 아기는 금세 처음 태어난 몸무게의 두 배를 넘어섰다. 작고 약한 생명을 돌보며 나는 매 순간을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다. 나는 아이를 온전히 사랑하며 스스로 치유받았다. 그리고 이 작은 아이는 내 이전의 삶은 물론 앞으로의 미래까지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독일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한 번도 찾아다니지 않던 무언가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내게 항상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
나는 어렸을 때 사랑이 아주 많이 고픈 아이였는데, 그 누구에게서도 채워지지 않던 그 사랑의 빈자리가 남편을 만나고 그리고 내 아이를 만나고 나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고 여린 아이가 내게 보여준 무한한 신뢰와 사랑이 내 마음을 충만하게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바라고 원했던 조건 없는 사랑을 기적처럼 내 아이에게서 발견했다.
그 뒤로 나는 아이의 생일이나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아이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한 장 한 장이 쌓여서 언젠가 한 권의 책이 되길. 그리고 켜켜이 쌓인 이 사랑의 기록들이 훗날 나 없이 살게 될 아이의 인생에서 버팀목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의 첫 돌을 기념하며 손수 편지를 썼다.
내 생에 단 하나의 소중한 운명 같은 너. 존재만으로도 삶의 이유가 되는 너. 이름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 항상 밝게 웃어주는 너. 무섭고 두렵고 아픈 것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나에게 안아달라고 손을 뻗는 너. 태어나서부터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무조건적으로 나를 사랑해 주는 너.
엄마가 너의 세상이라면 너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는 단 하나의 이유란다. 어쩌면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길을 걸어왔는지도 몰라.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게 하고, 누군가는 지루해하는 오늘 하루를 내게는 조금 더 열심히 살게 하는 원동력. 완벽하지 못한 세상에서 너에게만큼은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은 내 모습이 스스로 힘겨울 때도 있지만, 밝게 웃는 너를 보면 힘들었던 모든 게 다 괜찮아져. 무거운 책임감보다 더 무한한 사랑을 매일 경험하고 있으니까.
건강하고 밝게 자라주어서, 엄마 아빠를 많이 사랑해 주고 좋아해 주어서 참 고맙고 감사해. 네가 언젠가 너만의 생각을 담은 말을 하게 되고, 글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차곡차곡 쌓아온 이 예쁜 추억들을 꼭 다시 보여줄게. 지금도 매일 네게 속삭이는 말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인생에 운명처럼 나타나줘서, 그리고 건강하게 태어나줘서 고마워. 엄마아빠는 너를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랑해.
네가 어디에 있건, 무얼 하건, 어떤 모습이든 간에 엄마아빠는 항상 너를 지켜주고 응원하고 사랑할 거야. 엄마가 평생 받지 못할 것 같았던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함께하자.
육아휴직 기간 동안 나는내가 선택한 가족들과 치열하고 정신없지만 행복하고 바쁜, 육아의 나날들을 보냈다. 그날들은 사랑이 넘쳐흘렀고, 어떤 날들은 감사함이 가득 찼으며, 놀라움과 힘듦도 함께했다.
대상 영속성이란 물체가 어떤 것에 가려져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능력을 의미하는데, 아이가 대상 영속성을 깨닫게 될 무렵 나는 복직을 선택했다. 까꿍 놀이를 하면 엄마가 사라진 줄 알고 울던 아이가 어느 순간부터 내가 숨어있다는 걸 알고 기대에 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방긋방긋 웃기 시작한 시기였다.
너와 내가 잠시 떨어져 있더라도, 설사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내가 어디선가 너를 사랑하며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복직 후 첫 출근 날, 아이를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되자고 결심하며 출근 버스를 올라탔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날이었고 퇴근길에 첫눈이 내렸는데, 눈이 내려서 길이 미끄럽다며 남편이 나를 데리러 나왔다. 남편은 손도 마음도 늘 그렇듯 다정하고 따듯했다. 두터운 패딩을 껴입고 있어도 한없이 추운 겨울이었지만 내 마음은 완연한 봄이었다. 나는 내 스스로 선택한 이 삶이 더없이 충만하다고 느꼈다.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아이는 부쩍 서고 싶어 했다. 남편은 아침부터 잡고 서는 아이를 옆에서 보조하며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서는 것도 잘 걷는 것도 중요한데, 잘 넘어지는 것도 중요해. 이렇게 넘어져야 안 아프구나, 이렇게 넘어져야 덜 다치는구나 하고 알 수 있어. 그 말을 듣고 나는 잘 넘어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부모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넘어져도 된다고 얘기할 수 있는 다정한 어른이 되자고. 내 남편은 덤덤하게 저 말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몇 번을 넘어지고 일어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