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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부터 잘 키우자 Aug 14. 2023

그곳엔 정말 무엇이 있을까?

여행 정보 없는 여행 책 1

책장을 펼치면 늘 새로운 시공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나는 요즘 산티아고 길을 걷기도 하고, 누군가의 집짓기 현장에 있기도 한다. 그리고 아이슬란드의 파란 밤을 바라보기도 하고, 런던의 샌드위치 가게에 앉아 절대로 살 수 없는 그림의 경매가를 살펴보기도 하고, 이데올로기와 포성이 가득한 그날의 회색빛 서울의 거리에 서 있기도 한다. 언제 어디서라도 내가 가보고 싶은 그곳에 가닿을 수 있다는 것이 참 좋다. 온전히 나의 의지로. 그래서 책은 나에게 지니이고 바람돌이이고 호호아줌마다. 그리고 나의 수호신이다.


나의 글쓰기는 아주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책을 좋아한다거나 글쓰기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쓰는 글은 누구에게 내보일 수 있는 내용도 결코 아니었다. 나는 노리끼리한 연습장에 단단한 모나미 검정 볼펜을 꽉꽉 눌러가며 종이가 찢어질 만큼 겹치고 겹쳐 세상에서 가장 거친 말들을 쏟아내 놓고 마침내 속에서 뜨거움 대신 후련함이 느껴지고 온몸에 힘이 쫙 빠져 편안해지면 드디어 종이를 찢고 찢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누군가 나에게 질풍노도의 시기를 힘들게 보냈다고 말을 건넬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말은 웃긴 이야기일 뿐이다. 그건 일명 좀 사는 집 잘난 아이들이 성적과 메이커 옷과 싫어하는 반찬을 앞에 두고 하는 투정 같은 것쯤이다. 나는 하루하루 산산이 부서져버릴 것 같고, 지구의 내핵 깊숙한 곳으로 꺼져 다시는 온전한 형태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나를 온 힘을 다해 붙들고 있었으니까. 가루가 될 것 같은 내 자존감을 뭉치고 뭉쳐 작은 알갱이로 만들고 있었으니까. 나는 세상 어디라도 혼자 똑 떨어져 조용히 있을 그리고 나를 파편이 아니라 존엄한 유기체로 묶어줄 곳이 필요했다. 서점이 바로 나의 그곳이었다.

 

서점의 구석자리는 늘 조용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을 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말과 사연을 담고 있는 책들은 절대로 소리 내지 않고 내가 봐줄 때까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 험한 글쓰기를 멈추고 글을 읽기 시작했다. 고전도 읽고, 동화도 읽고, 역사도 읽고 그러던 중에 우연히 여행책을 읽게 되었다. 집과 학교, 서점만 겨우 왔다 갔다 하는 나에게 여행책은 신세계였다. 아마도 그때 처음으로 여행이라는 것에 호기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 가고 싶은 그곳으로 훌쩍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여행은 나에게 동경이었고 동시에 회피였지만 숨쉬기였다.


동경과 회피, 숨쉬기는 결혼을 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내가 해 본 여행은 가족들과 어쩌다 가는 여행과 대학 때 갔던 MT가 전부였다. 그런데 짝꿍은 나보다 더 여행을 좋아하고 많이 다녀본 터라 자연스럽게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여행은 언제나 일상과 나를 이별하게 해 주었고, 구름빵을 먹은 듯 동동 뜨는 기분으로 나를 가볍게 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일상은 여행을 떠나기 전의 그 일상이 분명 아니었다. 그만큼 내 마음이 안정을 찾고 균형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걷고 보고 생각했던 것들을 글로 쓰려한다. 나의 온전한 형태를 만들어 주고 신선한 평온함으로 나를 가득 차게 해 주는 그 여행에 대해 말이다. 나의 아주 사적인 여행일지라도 분명 누군가에게는 동경이고 회피이며 숨쉬기가 되리라는 작은 기대감을 가져보면서 말이다.

 

타박타박 한걸음 한걸음 잘 걷고 잘 보고 잘 써 보려 한다. 그곳에 정말 무엇이 있을까?


#여행 #글쓰기 #에세이 #인제 #속초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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