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세타 평원을 걷다 보면

[17일 차] 베르시아노스 > 만실라 데 라스 물라스

by Zorba

[Day 17] Bercianos del Real Camion > Mansilla de las Mulas


보름달을 시선에 두고 걷다 보면 어느새 등 뒤로 해가 서서히 떠오른다. 같은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는 없지만, 새벽과 아침 사이 오묘한 찰나에는 해와 달이 함께 있을 수 있다. 여느 때보다 밝게 빛나는 태양에 눈앞에 보름달이 황급히 자취를 감출 법도 하지만, 나름의 체면이 있는지 한동안은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킨다. 잠시 한 눈 판 사이 사라져 버린 달 덕분에 시선 둘 곳을 잃은 두 눈은 하늘에 떠있는 또 다른 물체를 찾느라 뒤를 돌아본다. 눈이 멀 듯 강렬한 햇빛에 다시 고개를 돌리면 순간의 잔상이 아른거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비틀거리며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전보다 선명하게 비친 길을 마주할 수 있다.


가끔 우리는 찬란했던 과거를 돌아보곤 한다. 다만 그곳에 너무 얽매여있다 보면 잔상만 더 오래 남을 뿐이다. 과거는 등 뒤에 남겨놓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환하게 비추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그동안 나는 과거의 순간들에 너무 젖어있진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러한 순간들은 안타깝게도 나를 오만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로 위안을 삼으며 노력의 가치를 스스로 폄하시켰다. 그사이 나와 같은 선상에 있던 이들은 앞으로 묵묵히 걸어 나갔고, 나는 여전히 잔상을 떨치지 못한 채 길 위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져 헤매고 있다.


메세타 평원의 변하지 않는 풍경과 끝나지 않는 도로 위에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안정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흐르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방에 갇혀버린 것만 같다. 지루한 이곳에서 자그마한 소일거리를 찾아보기도 한다. 불규칙한 간극의 구름 조각 면적을 유추해 본다거나, 새가 조용히 지저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거나. 아까보다 따스해진 햇살은 이 지루함의 공기를 더 짙게 만든다. 괜히 날씨가 좋으면 아무것도 안 한 채로 나태한 하루를 보내고 싶어지지 않은가. 지금 내 상태가 정확히 그러하다. 이제 그만 걷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등락 없이 편안하기만 한 이 길이 좋지만은 않다.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도 전보다 괜히 무겁게 느껴진다.


나는 천성이 게으른 사람인 듯하다. 다만 사회가 나에게 항상 과제를 던져주었기에, 그것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태함을 잠시 뒤로 미뤄두었던 것 같다.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했고,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서는 열심히 준비해야 했다. 다행히도 나는 목표라는 것이 뚜렷하게 주어지면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해내는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다음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더 큰 부를 목표로 달리기도 하지만, 나에게 그것은 목표가 될 만큼 자극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잊고 지냈던 천성이 살면서 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고, 따스한 햇살 아래서 매일같이 나태한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스스로는 그런 나태한 모습을 용납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지난 시간 특정 목표를 향해 달려왔던 나는 어느새 부지런함이라는 미덕 역시 내재화한 상태였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나는 원래 이렇게 게으른 사람이 아니야." 내면의 소리를 듣다 보니 현재 상황에 견딜 수 없어 휴직을 했는지도 모른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메세타 평원을 지나 만실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에 도착한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오늘은 일요일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일요일에 식당을 잘 열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의 일요일을 보내며 학습한 상태였다. 그래도 모든 식당이 문을 닫았을 줄을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이 마을에는 마트조차 없다. 마을 곳곳을 방황하다가 주유소 옆에 편의점 한 개를 간신히 발견한다. 기쁜 마음에 물건을 집어 보지만 이곳은 다디단 독점의 맛을 이미 경험한 듯하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사악한 가격에 눈물을 머금고 최소한의 식량만을 계산하고 알베르게로 돌아온다. 그날 모든 순례자들은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각자 고이 간직하고 있던 비상식량들을 꺼내먹는다.


지난 5일간의 메세타 평원은 순례길 중 가장 힘든 코스였다. 끝없이 펼쳐진 평지를 걸으며 지루함과 싸워야 하는 정신의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전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 나는 안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반복되는 무의미한 일상을 견딜 수가 없다. 어쩌면 도전으로 가득했던 20대 초중반의 모습이 가장 나다웠는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나는 인생의 대부분은 지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시간이 싫증 난다고 투정을 부리기엔 길을 너무 좁게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책해보기도 한다. 어찌 되었건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가끔씩 낙엽이 살포시 떨어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낙엽은 풍파에 못 이겨 모양이 엉망이기는 하지만, 꾸준히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내 발 앞에 완벽한 모양의 낙엽이 떨어지는 순간도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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