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차] 만실라 데 라스 물라스 > 레온
[Day 18] Mansilla de las Mulas > Leon
레온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평소보다 가볍다. 지루함과 싸우는 나날의 연속이었던 메세타 평원을 지나 드디어 도시를 만난다. 산티아고까지 아직 이주정도 남았지만, 레온을 지나게 되면 앞으로 이 정도 크기의 도시는 없기 때문에 여기서 문명의 위엄을 최대한으로 느껴보기로 한다. 들뜬 마음 때문인지 새벽 공기가 상쾌하다.
쉬는 시간도 최소화하며 빠른 걸음으로 나아간다. 이미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할지 다 생각해 두었다. 멀리서도 보이는 층고가 높은 건물들이 손짓하고 있는 듯하다. '어서 와, 레온은 처음이지?'
도착하니 12시 5분 전이다. 어제 점심으로 생각해 두었던 KFC 오픈시간을 정확하게 맞췄다. 다행히 오늘의 첫 손님만 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행사할 수 있다. 새 기름으로 갓 튀겨낸 후라이드 치킨의 첫 입을 베어무는 순간 나는 아직 도시의 생활을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연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고도화된 문명이 주는 여러 선물에 익숙해져 버린 탓에 오랫동안 꿈꿔왔던 목가적인 삶은 잠시 미뤄두기로 한다.
알베르게에서 짐을 내려놓고 정비를 마친 후,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보티네스 저택(Casa Botines)으로 향한다. 오랜만에 각자의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한다. 근 며칠간 끝없이 이어진 황량한 길만 걷다가 엄마의 손을 잡고 하교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이제야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보니 어느새 보티네스 저택에 도착한다. 예전에 바르셀로나를 다녀온 친구가 가우디 건축물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특이하다고 했는데, 내가 처음 마주한 가우디의 건축물은 주변과 나름 조화로운 모습이었다. 그래도 역시나 다르긴했다.
예전에 한창 건축물에 관심이 많았던 시기가 있었다. 미술작품이나 사진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아름다운 건물에만 들어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석구석을 눈여겨보곤 했다. 식견이 얕아 건축물 곳곳에 숨겨진 건축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공간의 중앙에 서서 창틀 사이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을 온몸으로 느꼈던 경험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작품 중 하나를 감상할 수 있었다.
7유로 정도를 지불하고 보티네스 저택의 내부로 들어갔다. 이곳은 아스토르가에 위치한 주교궁(Palacio Episcopal de Astorga)과 칸타브리아 지방 코미야스에 위치한 엘 카프리초(El Capricho)와 함께 가우디가 스페인에서 바르셀로나로 대표되는 카탈루냐 지방 이외의 지역에 남긴 단 세 개의 건축물 중 하나라고 한다. 마침 이번 순례길 코스에는 아스토르가가 있고, 귀국 비행기도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하기에, 엘 카프리초를 제외한 가우디의 모든 건축물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이 끝날 즈음 가우디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게 되기를 바라며 천천히 저택을 둘러본다.
원래는 주택 겸 상업용 건물이었는데, 현재는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어 건물 내부 곳곳에 다양한 설명과 전시를 만날 수 있었다. 가우디에게는 구엘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건축가라도 자신이 상상했던 건축물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큰돈이 필요한데, 그의 능력을 일찌감치 알아본 구엘 덕분에 가우디는 그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사실 바르셀로나에 있는 대부분의 건축물도 구엘의 지원 아래 지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바르셀로나에는 구엘 공원이라는 이름의 공원까지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 보티네스 저택의 설계를 의뢰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마침 이 구엘과 친분이 있었기에, 이 인연을 통해 가우디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들은 당시 레온에서 활동하던 직물 회사와 은행의 공동 소유주였고, 건물의 1층은 상업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인지 현재 건물 내부에도 은행과 직물 회사의 옛 풍경이 그대로 재현되어 전시되어 있었다.
상층부는 주거용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가우디가 자연에서 오는 기하학에서 영감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문고리를 포함해 안에 전시되어 있는 가구들에 독창적인 곡선미와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그 외에도 그림이 여러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쪽에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가우디의 다른 건축물에 대한 여러 설명을 읽어보면서 추후에 있을 바르셀로나 여행의 프롤로그를 맛보기도 했다. 덤으로 가우디가 살던 카탈루냐 지방에서 상징처럼 전해지는 재밌는 이야기도 있었다.
옛날에 어느 왕국에 무시무시한 용이 살고 있었다. 이 용은 왕국의 사람들을 잡아먹었고, 사람들은 그를 달래기 위해 매일 가축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가축이 모두 떨어지고, 결국 제비 뽑기를 통해 사람을 바치게 되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왕의 외동딸인 공주가 뽑히고 말았다. 공주가 제물로 바쳐지기 직전, 백마를 탄 성 조지(Saint George)라는 기사가 나타나 공주를 구하고 창으로 용을 찔러 물리쳤다. 그리고 그 용이 쓰러진 자리에는 장미꽃이 피어났다.
가우디는 이 전술을 건축 곳곳에 표현하고 했는데, 보티네스 저택의 건물 외벽 한가운데에 성 조지가 용을 무찌르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었다. 저택 전체를 수호하는 수호자의 의미와 용을 물리치는 정의와 용기의 상징이 담겨있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사그리아 파밀리아 성당에도 성 조지가 표현되어 있다는데, 가자마자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다. 아는 만큼 건축이 다르게 보인다.
보티네스 저택을 나와서 도시를 한 바퀴 빙 둘러본다. 레온 대성당도 그렇고 중세 느낌이 물씬 나는 곳이다. 다만, 로그로뇨나 부르고스처럼 특색 있는 음식이 없는 점은 아쉬웠다. 붉은 노을을 뒤로하며 중국 음식점에서 배를 채우고 알베르게에 돌아왔다. 오랜만에 여행객의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한 듯하다. 문득 한 천재 건축가가 한 나라의 관광을 먹여 살리는 것을 보니 전보다 건축에 관심이 많아졌다.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유럽은 선조들을 잘 만나서 잘 먹고 산다고 했는데, 틀린 말은 아닌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