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프랑스 친구

[19일 차] 레온 > 산 마르틴 델 카미노

by Zorba

[Day 19] Leon > San Martin del Camino


레온에서의 관광객 놀이는 하루로 충분하다. 역시나 큰 도시라 하루쯤 쉬어가는 이들도 종종 보이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묵묵히 가야 할 길을 걸어가기로 한다. 레온의 끝자락에 위치한 광장 중앙의 순례자 동상을 지나친다. 신발을 벗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보니, 이주일 전 산티아고 둘째 날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순례길을 너무 쉽게 보고 하루에 40km 정도를 걸었는데, 팜플로나에 도착하기 5km 전 벤치에서 이 순례자와 정확히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발까지 벗었던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레온을 벗어나면 늘 그랬던 것처럼 곧장 자연으로 회귀할 줄 알았는데, 작은 도시와 마을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순례길은 차도 옆에 평행하게 있다가도 어느샌가 방향을 틀어 차도와 멀리 떨어진다거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지나가는 차가 많이 없기에 편안한 분위기에서 순례길을 즐길 수 있었다. 다만 오늘은 이 길이 어떤 심술이 났는지 몇 시간을 걸어도 시끄러운 차도를 옆을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항상 걷는 것은 약간의 노동을 수반했지만, 오늘은 그 노동의 강도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같이 걷던 부산 친구와 대구 동생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점차 말수가 줄어들었다. 침묵 사이로 자동차의 시끄러운 엔진소리 만이 남았고, 소리의 증폭에 비례하여 우리 셋의 간극은 벌어지게 되었다. 마침 또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조금씩 짜증이 밀려오기도 한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최악의 하루로부터 구해준 프랑스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이쯤 되면 보통 길에서 한 번쯤 대화를 나눠본 사람을 만나기 마련이기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꽤나 귀한 순간이다. 설레는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호셀라라는 이름의 키가 큰 그녀는 프랑스 파리 출신이었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프랑스 사람들을 가장 많이 마주친다. 거리가 가까운 것이 아무래도 한 몫하는 듯하다. 비슷한 이유로 이탈리아 사람들도 간혹 보이는데, 알베르게에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인이 모이면 꽤나 시끌벅적하다. 이 세 나라의 언어는 각각 다르지만 라틴어에 뿌리를 두기 때문에 비슷한 점이 많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한다. 혼타나스에서 만난 이탈리아 친구가 알려주었다. 내 나이대의 유럽인 대부분은 영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지만, 윗 세대 유럽인은 본토 언어만 할 줄 아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어르신과 스페인 어르신이 대화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화에 끼고 싶어 안달이 나기도 한다. 또 순례길에는 독일 사람들도 여럿 보이는데, 여기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유창한 영어를 구상한다. 이게 유럽 GDP 1위 국가의 위엄인가 싶다.


이 길을 걷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장에서 출발했을 것 같지만, 막상 물어보면 각양각색이다. 팜플로나, 로그로뇨와 같이 순례길 상에 위치한 대도시에서 시작한 사람들도 간혹 보인다. 근데 프랑스 친구들에게 어디에서 출발했냐고 물어보면 한 명도 빠짐없이 본인의 집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웃어넘겼지만, 지금까지 만난 프랑스인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같은 대답을 하는 것을 보니 프랑스에서는 집에서부터의 순례가 일반적인 듯해 보인다.


"그러면 너도 파리에서 출발한 거야?"

"응. 거리로 따졌을 때 생장이 거의 중간지점이야."

"대단하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호셀라는 압박붕대로 칭칭 감은 오른쪽 다리를 보여주었다. 쉬지 않고 한 달 넘게 걸었더니 다리 근육에 무리가 가서 마침 레온에서 일주일 정도 쉬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래도 호전된 상태인데 혹시나 또 다칠까 봐 평소보다 천천히 걷는다고 한다. 나는 자연스레 걸음을 맞춰 걸으며 각자 살아온 이야기를 시작했다.


호셀라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 자퇴를 하고 제과를 배우기 시작했다. 평생 살아왔던 파리를 떠나 리옹의 유명한 베이커리에서 2년간 근무했다. 어릴 때부터 본인이 하고 싶었던 일이라 행복했지만, 일에 전념하다 보니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을 잃어버린 것 같아 그만두게 되었다. 요식업계는 근무가 타이트했고, 타지에 생활하며 이 힘듦을 이야기할 주변 사람들이 없었기에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 그렇게 호셀라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고, 다른 베이커리에서 더 배울지 아니면 본인이 새로 차릴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 결정을 하기 전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산티아고를 걷기 시작했다고 말해주었다.


사람은 저마다의 고충이 있다. 본인이 사랑하는 일을 하면 남들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호셀라를 보니 막상 그것이 전부는 아닌듯하다. 축구 게임에는 육각형 미드필더라는 말이 있다. 슛, 패스, 드리블, 수비, 스피드, 피지컬 등 공수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선수는 게임상의 능력치가 거의 육각형과 비슷한 형태를 띠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득 행복한 삶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삶의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어느 정도 고루 갖춰져야 하지 않나 심심찮게 생각해 본다. 돈, 명예, 권력 못지않게 사랑, 가족, 친구도 중요하다. 과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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