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차] 산 마르틴 델 카미노 > 아스토르가
[Day 20] San Martin del Camino > Astorga
개와 늑대의 시간이 있다. 프랑스 말로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아 애매모호한 경계의 시간을 뜻한다. 나에게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는 황혼의 시간은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순간이었다. 오늘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시간이 익숙했던지라, 밤에서 낮으로 바뀌는 순간은 자주 목격하지 못했다. 늦은 밤에 잠을 이루는 습관이 몸을 지배했던 터라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산티아고를 걷기 시작한 후부터는 늘 마주했던 개와 늑대의 시간이 정반대로 찾아왔고, 나는 하루가 지날수록 서서히 여명의 시간에 빠져들었다. 이윽고 나는 오늘 새벽 살면서 최고로 아름다운 하늘을 만났다.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압도되었다.'가 가장 가까울 듯싶다. 햇빛은 어둠 속으로 질 때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떠오를 때가 더욱 황홀하다. 지금껏 새벽에 일어났던 사람들은 이런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것일까.
자줏빛으로 물들었던 새벽녘에 눈을 떼지를 못한다. 카메라는 이 순간을 온전히 담지 못하기에 최대한 눈으로 많이 담아두어야 한다. 늘 해오던 말이지만, 오늘은 특히나 그렇다. 문득 모든 것이 완벽한 하루가 될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든다.
아스토르가(Astorga)로 가는 길가에 순례자들을 위해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는 공간을 만난다. 한 할아버지께서 운영하시는 곳이었는데, 벽면이 전 세계 나라들의 국기와 할아버지가 순례자들과 찍은 사진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내부로 들어가니 여러 종류의 빵과 과일이 책상 위에 놓여있다. 간식과 함께 손수 만들어주신 커피를 한 잔 마신다. 영어를 못하시는 분이라 비록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마음만은 온전히 느낄 수 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떠나는 찰나에 할아버지께서 "Donativo"라고 말씀하신다. 역시나 기부제로 운영되는 곳이다. 좋은 마음으로 기부함에 남은 돈을 넣고 길을 나선다.
얼마나 걸었을까. 길의 우측에 또 다른 기부제 카페가 보인다. 야외에서 푸드트럭 같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엘 자르딘 델 알마(l Jardin Del Alma)라고 적혀있다. 스페인어로 영혼의 정원이라는 뜻이다. 조금 전에 갔던 공간보다 훨씬 넓고 제공되는 음식과 음료도 많았다. 적당히 허기진 순간이었는데 타이밍이 좋다. 오랜만에 보는 삶은 달걀에 영혼이 팔려 순식간에 4개를 해치운다. 목이 메일 찰나에 오렌지 주스를 들이켠다. 이곳을 운영하는 아저씨는 내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던 관심도 없이 다른 순례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순례길에서 자주 만나는 프랑스 친구들이 고양이와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다. 친구들한테 들어보니 여기 사장님은 이 카페를 매일 같은 자리에서 십여 년간 운영하고 계신다고 한다.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내가 떠날 때까지도 이야기를 나누고 계셔서 선뜻 말을 걸 수는 없다. 대신 조용하게 그 따뜻한 마음의 답례로 넉넉히 기부를 하고 떠난다. 사실 이런 음식쯤이야 몇 시간만 걸으면 마을에서 충분히 먹을 수 있지만, 예기치 못한 곳에 놓인 이 카페는 음식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가령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는 사실 정도?
모든 것이 완벽한 하루에 절로 기분이 좋아 옆에 있는 부산 친구와의 수다가 길어진다. 오늘의 주제는 학창 시절이다. 서울과 부산. 사는 곳은 달라도 같은 시기의 학창 시절을 보냈기에 우리는 무엇을 말할 때마다 '그때 그랬지'를 연발하며 신나게 떠들어댄다.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재밌게 놀았던 기억밖에 없다. 딱지치기, 학종이 넘기기, 쎄쎄쎄, 실뜨기, 공기놀이 등. 하루가 다르게 유행은 바뀌었고 나는 단 한 번도 놀이의 유행에 뒤처진 적이 없었다. 누구보다 지기 싫어했던 성격이었기 때문에 모든 놀이를 악착같이 연습했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부산 친구도 당시 유행했던 모든 놀이를 알고 있었다. 서울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중학교 때는 친구들과 많이 어울려 놀지 않았던 것 같다. 지는 것을 싫어했던 성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놀이에서 공부로 그 대상을 옮겨갔다. 물론 항상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하는 친구들은 있었지만, 나는 학교가 끝나면 누구보다 빨리 집으로 가서 간식을 먹고 학원에 갈 준비를 했다. 학교 이외에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은 오로지 축구할 때뿐이었다. 주말에는 도서관에 가서 시험공부를 했었고, 성적은 언제나 상위권을 유지했다. 지금도 여전히 머리는 그리 좋지 않은 듯하지만, 의자에 엉덩이 붙이기는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 성실함도 재능이라면 나는 이 쪽에는 그래도 남들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버지를 많이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공부는 재능의 영역도 무시를 못하는지라 한 번도 시험에서 1등 한 적은 없지만 2,3등은 꾸준히 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싸이월드가 유행했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은 도토리, 1촌 신청과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나는 그게 뭔지 하나도 몰랐다. 친구들은 근처 서현역에 가서 PC방, 노래방을 가고 맛있는 음식을 같이 먹었지만 나는 그랬던 기억이 없다. 그 당시에는 그런 게 크게 부럽지 않았다. 난 그 시간에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고,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해 이유를 찾은 적도 없었다. 자연스러운 나의 일상이었다. 그저 점심시간과 체육시간에 같이 공을 차며 기뻐할 친구가 있으면 그걸로 되었다. 중학교 3학년이 끝나갈 무렵 어느 날 아버지께서 물어보셨다.
"아빠가 회사 발령으로 중국에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는 어떠니?"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네"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나는 2010년 9월의 어느 날 학교 점심시간에 조퇴를 하고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내 중학교 시절 첫 조퇴였다.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지만 그렇게 아쉬운 마음이 크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나의 중학교 시절은 친구가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다. 어쩌면 어릴 때부터 이사로 인한 전학을 많이 다녔던 탓에 이민도 크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친구들과의 추억을 많이 쌓지 않았기 때문에 후회 없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떠났던 것 같다. 그냥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는 한국을 떠나 고등학교 시절을 중국에서 보냈다.
지금에서야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누군가가 그때의 나를 본다면 그저 안경 쓴 샌님이지 않았을까? 그러한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면 할 말은 없겠지만, 공부만 했던 삶을 선택했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한 다른 것들에 대한 후회는 어쩔 수 없이 남는 듯하다. 정체성이 확립되기 시작하는 시기에 괜히 인간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동네 친구 단톡방이 꾸준하게 울리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 한편에 부러운 감정이 들기도 한다.
대학에 오면 실컷 놀 수 있다고 누가 이야기했는가. 나는 그러지 못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노는 법을 알지 못했다. 어디선가 얼핏 '아름답다'에서 '아'는 한자로 '我(나 아)'이기 때문에, 이 말은 '나답다'라는 뜻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나는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던 학창 시절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웠던 것 같다. 내가 요즘 느끼는 공허함은 내 삶이 충분히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약간의 해답을 찾은 것 같다.
어느새 아스토르가에 도착했다. 초콜릿이 유명한 곳이라 마을 곳곳에 초콜릿 가게들이 즐비하다. 그중 한 가게에 들어가서 생전 처음 보는 초콜릿을 구경하다가 결국엔 계산대 앞에 놓인 딸기맛 츄파춥스를 집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착한 일을 했을 때 츄파춥스를 주곤 하셨다. 선생님이 큰 통에서 츄파춥스를 한 줌 꺼내 펼쳐 보이실 때마다, 나는 언제나 망설임 없이 딸기맛을 집었다. 츄파춥스 껍질은 뭐 이리 촘촘하게 붙여놨는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벗겨내는데 애가 탄다. 어쨌거나 어린 시절 추억을 마무리하기에는 이만한 게 없다. 츄파춥스를 입에 물고 가우디가 설계하고 건축한 아스토르가 주교궁에 도착한다. 이때다 싶어 엊그제 보티네스 저택에서 습득했던 지식을 부산 친구에게 쏟아낸다. 큰 감흥은 없는 듯하다.
알베르게로 돌아가는 중에 반대편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달려온다. 메세타 평원을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덴마크 친구 이냐시오와 캐나다 친구 샤티라다. 반가운 마음에 포옹으로 인사를 한다. 일주일 만에 처음 보는 것이다. 오랫동안 길에서 만나지 못하다 보니 혹시 앞으로 못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작별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아 마음 한편이 불편했었는데 참 다행이다.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했다. 앞으로 너무 오랫동안 못 보면 메시지라도 하나 남기자고 약속한다. 카미노의 소중한 인연은 계속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