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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치즈 그리고 은

by 설다람

과거 연금술사와 점성술사들은 행성과 금속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믿었다. 태양은 금, 달은 은, 화성은 철, 수성은 수은, 목성은 주석, 금성은 구리, 토성은 납 뭐 이런 식이었다고 한다.

이 믿음의 낭만적인 부분은 광산에 파묻힌 금속이 밤하늘을 돌고 있는 행성의 기운을 받아 고유한 속성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둘의 은밀하고도 아득한 소통이 서로를 더욱 서로답게 만드는 것, 연금술과 점성술은 영혼의 본질이 뭔지 아는 장르들이다. 그러니 후손인 화학과 천문학 역시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시험만 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둘을 좋아할 준비가 되어있다. 사실 시험만 치지 않는다면, 웬만한 건 다 좋아할 수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은 이미 우주에서 사라진 별일지도 모른다. 1억 광년 떨어진 곳의 별빛은 1억 광년 전의 빛이다. 그 전에 별이 사라졌다고 해도,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아직 나머지 빛이 우리에게로 오는 중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싼 드넓은 우주는 과거의 우주이다. 조금 더 까다롭게 굴자면, 물체에 반사된 빛이 수정체로 들어오는 데에도 시간이 지났으니, 우리가 보는 것도 엄밀히는 모두 과거의 장면이다. 연금술사와 점성술이 그린 금속과 행성 간의 교감도 로맨틱하지만, 우주의 빛과 우리의 교감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도 그만큼 로맨틱하다.

이걸 보면 왜 우리가 닿을 수 없는 타인을 바라보는지, 과거에 집착하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냉장고에 넣어둔 비스킷처럼 입이 심심할 때마다. 후회를 꺼내먹는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에너지 일부를 후회에서 얻는다. 후회는 멀리 있지만,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지금 느끼지만 모두 어제의 어제로부터 온다. 후회도 역시 연금술과 점성술의 후손 중 하나이다. 비록 화학과 천문학만큼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계보는 같다. 마냥 미워하기엔 소중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나의 기본 구성 요소엔 후회 함유량이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좋은 광물 자원으로 쓰이기 위해서는 후회의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 반성과 달리 후회는 철저하게 과거 지향적이다. 마치 전 세계 도시들이 80년대 시티팝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제대로 터뜨리지 못했던 혹은 너무 크게 터뜨렸던 팝을 재생하고 또 재생한다.

여기서 후회의 힘을 발견할 수 있다. 후회는 미래의 어느 지점에서도 되풀이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도 미래에 떠올릴 후회의 한 순간이다. 어떻게든 미래에 떠올릴 수밖에 없는 장면 속에 있는 것이라면, 선택지는 하나다. 아찔할 정도로 끔찍한 짓을 저질러야 한다. 이 사건의 근처로 정신이 다가가면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피해서 갈 수 있도록. 제대로 망쳐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다시는 후회한 짓을 그리고 후회할 짓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라는 말은 무엇도 약속해주지 않는다. 연금술과 점성술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은 하나의 선택에 압축되어있다. 일어날 수도 있었던 다른 선택의 과거에 후회가 있는 것이라면, 그건 나의 후회가 아니다. 그 후회의 주인은 그것을 선택한 미래의 나일 것이다. 단지 그 미래의 나와 다른 미래의 내가 서로를 과거 지점으로 보며 공명하는 것이다.


월레스와 그로밋을 보면 달이 거대한 치즈 덩어리로 나온다. 달은 기호 식품이다. 편하게들 밤을 향해 저어나가자. 은도 채굴하고 치즈도 먹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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