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집을 정리하며
흔적, 痕迹
어떤 현상이나 실체가 없어졌거나 지나간 뒤에 남은 자국이나 자취.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쯤이었던 것 같다. 한 걸음 떼기도 힘들어서 걸음마다 숨을 몰아쉬며 움직이셔야 했던 아버지가 그즈음 목욕(한국인들은 알지. 목욕과 샤워의 뉘앙스가 다른 것을)을 하시고 싶다고 하셨다.
힘겹게 온 몸을 깨끗이 씻고 나오시며, 어머니 부축을 받아야 했을 때 바닥에 흥건하게 떨어진 물자국에 어머니가 미끄러져 뒤로 쿵 하고 넘어지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마음이 너무 안 좋아서 자식들과 통화에
"내가 괜히 목욕한다고 해서 너네 엄마 다치게 했다." 하시며 슬픔과 자조 섞인 한숨을 쉬셨었다. (우셨는지, 안 우셨는지 모르겠지만 가끔 내 꿈엔 울며 가슴 아파하는 아버지가 나타나곤 했다.)
아버지는 그리고 며칠 후 새벽 주무시다 일어나 , 옆에 누워 단잠에 빠진 어머니를 깨우고 119를 불러달라고 하셨다. 잠이 덜 깬 채로 두려움을 느끼며 전화를 들었을 어머니. 그 곁에서 아버지는 깨끗한 셔츠를 입고 단추를 하나씩 하나씩 잠그고 계셨다고 했다.
아버지도 태어날 때 그랬겠지. 그때, 매끈한 몸으로 세상에 나와 깨끗하게 씻겨지고 새하얀 배내옷 입혀졌었겠지. 아버지는 태어날 때처럼 그렇게 깨끗하게 씻은 몸 위에 깨끗한 옷을 입고 세상에 나오기 전의 그 '세계'로 다시 돌아가셨다.
육신의 흔적... 남기지 않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흔적을 발견했다. '가족들의 사랑을 온전히 느끼고 간다.'는 수첩 속 메모 몇 줄 속에 담겨 있었던 아버지의 그 마음. 수첩은 어머니의 손에 들려 뜨거운 불 속에 던져졌고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그 말들은 내 가슴속에 아주 작은 흔적으로 남아 가끔씩... 아버지 없는 허전한 맘을 위로해주었다.
아버지가 떠난 빈자리를 보면서 사람이 떠난 자리는 이렇게 아름다워야겠구나 생각했다.
나도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잔해 殘骸
1. 썩거나 타다가 남은 뼈.
2. 부서지거나 못 쓰게 되어 남아 있는 물체.
3. 넋이 나간 채 남아 있는 육체. 흔히 ‘산송장’을 이른다.
4. 혹독하였던 어떤 현상이 남긴 흔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그곳에 다녀왔다.
집을 비우라고 그에게 통보한 지 정확히 네 달만이었다. 그마저도 언니들이 스케줄 정확하게 잡아서 모이라고 하지 않았다면, 난 영영 그 문을 열고 싶지, 아니 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속에 남겨진 모습이 아버지가 떠나고 난 그 자리처럼 흔적도 없었으면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간 그의 행태를 보면.
예상대로 비번을 바꿔놓은 덕(?)에 열쇠집에 전화를 걸고 기다리는 동안 앞집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나오셨다.
"그 집 사람 안 산지 오래되었는데...."
"저예요."
마스크를 잠깐 내렸다 올리며 나의 신분을 확인시켜준 그 순간, 아주머니는 기다렸던 사람을 본 것처럼 들어와 커피 마시라며 반가워(?)해주셨다. 아주머니와 몇 마디 주고받으며 열쇠집 사장님의 연락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정답을 알지 못하면 답답해하는 병이라도 걸린 걸까? 아주머니 나름대로 추리하고 짜 놓은 '나'의 스토리를 듣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그 스토리 속에 그는 천하의 나쁜 놈쯤 되어있었던 거 같았다.
"네, 뭐 그렇게 됐어요."
"아이들도 많이 컸겠네요. 그렇죠?"
잠깐의 만남. 열쇠집 아저씨가 집 앞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되어서야 앞집 아주머니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먼지 가득한 아이들 자전거를 보며 이미 내 정신은 아득해졌다.
집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도 같았고, 또 다르기도 했다.
난 뭘 기대했던 것일까?
거실 한가운데에 넋이 빠져 선 나를 두고, 언니들이 분주했다.
커다란 가전들과 가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흔적 대신 그 자리에 나와 아이들의 추억들이 어지럽게 쏟아져있었다.
아이들 돌반지 챙겨야겠다는 언니의 말에 안방에서 장을 여는 순간, 텅 비어있는...
돈이 중요하지 않았다. 사는 내내 그랬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그에게 가족의 의미를 알게 해주고 싶었고, 사랑을 느끼다 간 내 아버지처럼 그에게도 제대로 된 가정의 모습이 이런 거라고 느끼게 해주고 싶었으며 아주 먼 훗날엔 행복한 삶을 마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돈이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돈은 존중해주었고, 내 것을 아낌없이 썼다.
그랬던 내게 그가 남겨놓은 건...
아무렇게나 쏟아버리고 간 아이들과 내 물건들,,, 추억들,,,
그리고 그가 손에 꼭 쥐고 간 것은... 돈이 될만한 가전과 가구, 그리고 금붙이라니...
재판 내내 낯설었던 그의 실체. 이 날 더더욱 그의 실체가 낯설어졌고, 혼돈이 환멸이 되고 복잡한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눈물로 한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밖에 살 수 없었던 거니?'
아이들 사진과 탯줄 도장을 쓰레기 더미 속에서 주워 만지며, 그가 남긴 추악하고 냄새나고 더러운 잔해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이내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던 그가 딱했고, 그의 유년이 안쓰럽고, 그의 부모가 미웠던...
결혼 생활 내내 들었던 기분이 떠올랐다.
하나 이제 그 기분들도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며, 폐기물로 명명할 참이었다.
"아직 살아있나 봐."
갑자기 분주함이 정적으로 바뀌었다.
스킨답서스가 천장을 두르고 두르다 아래로 아래로 바닥까지 닿을 듯 자라 있었다.
"물도 주지 않았을 텐데... 끝에 새 잎 돋는 것 좀 봐."
언니들의 시선이 아주 잠시 스킨답서스 잎 끝으로 모여 정지해 있었다.
외롭게 혼자 잎을 피우고 있었던 화초가 안쓰러웠다. 말없이 사력을 다해 마지막 잎을 틔우고 있던 아이.
자신을 방치했다고 소리치던, 왜 날 버리고 갔냐고 울먹이던, 다섯 살 소년에서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그의 영혼의 잔해 같던 연초록의 가녀린 이파리. 하지만 내가 품을 순 없었다. ㅡ이래도 날 사랑할 거냐고, 이래도 날 버리지 않을 거냐고ㅡ 나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모든 날들을 나는 품을 수 없다.
나는 그의 부모가 아니므로.
스킨답서스 미안. 데려갈 수 없어.
그리고 사랑했던 모든 시간들.
안녕.
대충 챙길 것들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해가 이미 지고 골목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대학시절을 모두 같은 지역에서 보낸 언니들과 나는 닭갈비를 먹으러 갔다. 언니들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서 서로 함께 자취를 하기도 했었고, 아닌 적도 있었지만... 같은 곳에서 대학 생활을 했던 네 자매 서로서로의 아롱다롱 한 추억들이 닭갈비 불판 앞에서 도란도란 하나의 추억이 된 것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언니들이 씩씩하게 짐을 정리해줘서, 언니들이 배부르다고 맛있다고 열심히 밥을 먹어줘서 나는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넘어가지 않는 밥을 조금 넘기고 나서는데 언니들은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먹는다. 내 슬픔이 희석되는 순간이었다.
'다행이다. 언니들이 같이 와줘서.'
호텔로 가서 맥주를 놓고 그 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재테크 얘기도 하고, 서로 고민스러운 이야기도 주고받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폐기물 업체 사장님이 8시부터 3시까지 작업 진행 예정이라고 하셔서, 우린 아점을 먹으러 갔다. 어제까지 먹히지 않던 밥이 잘 먹혀서 정말 오래간만에 맛있게 밥을 먹었다. SNS에 상차림 인증 사진 올리면 녹두전을 추가 서비스해준다고 해서 서로 사진 찍고 올리고... 그러면서 웃기다고 깔깔거렸다. 아주 어릴 적 참새 쫓으러 논 옆에 엄마가 만들어준 그늘 밑에서 간식을 먹으며 새 쫓던 일은 까맣게 잊고 수다 삼매경이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밥을 먹고 부동산에 들러 집을 내놓고 중간 처리 상황을 확인하느라 집에 잠깐 들렀다가 언니들과 커피를 마시러 갔다. 그 사이에 둘째, 셋째 언니는 원주에 왔으니 복숭아를 사가야 한다며 알차게 복숭아 쇼핑까지 마치고 합류했다.
일을 거의 마무리하고 언니들과 마주 앉아 있으니 세상 다 가진 듯 든든했다.
3시쯤 집에 갔더니 일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가 더럽히고 간 그곳의
잔. 해.
온갖 것이 뒤범벅되어 집 밖으로 빠져나가, 폐기물이란 이름으로 트럭을 타고 내가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 갔다.
공간(空間)
1. 아무것도 없는 빈 곳.
2.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범위. 어떤 물질이나 물체가 존재할 수 있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3. 영역이나 세계를 이르는 말.
'이제 다 끝났다.'
텅 빈.. 그야말로 공간이 덩그러니 남아있었고, 상처투성이 너덜 해진 내 영혼도 거기에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이곳은 다시금 아름다운 누군가의 흔적을 남길 어여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겠지.
일을 다 마쳤으니 언니들과도 안녕을 했다. 둘째, 셋째 언니는 같은 방향이니 차를 타고 먼저 길을 나섰고 나는 큰 언니를 버스터미널에 내려주고 아이들에게도 서둘러 돌아왔다.
하늘이 참 맑았다. 구름도 완벽한 날.
"난 결혼하기 전까진 걱정 없이 살았는데, 결혼 후부터 힘든 일 투성이야."
언니들 중 누군가가 말했는데,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하며
'까짓 꺼. 그래. 더 힘든 일이 생겨도 잘 헤쳐나감 되지. 걱정 없던 날들이 오래됐었으니 시름 가득한 날도 오는 게 당연한 거지. 오늘의 이 회복된 기억을 잘 새기면 된다. ' 고 생각했다.
아름답게 살아야겠다.
아버지처럼 향기롭고 따스한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p.s
이틀 만에 집이 팔렸다.
아이들이 나고 자란 곳.
가슴이 순간 저릿하다.
다음 주에 계약하러 갈 때는 아이들과 가서 깨끗한 빈 집과 안녕을 하고 올 생각이다.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겐 아름다운 기억만 가득한 곳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