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나이로 26살, 한 번도 외국에 가 본 적 없다는 게 이렇게 놀랄 일인가! 첫 해외 출장이 결정된 날이었다. 회사에선 당연히 내가 여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무작정 나의 이름을 해외 출장 명단에 올렸다. 뒤늦게 여권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모두가 화들짝 놀라 내게 되물었다.
"진짜? 진짜로?"
"그럼 여태 외국을 한 번도 안 가봤어?"
"일본도 가본 적 없어?"
"대학생 땐 뭐 했어?"
그들은 마치 '신인류'를 만난 듯 와다다다 질문을 해댔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 얼버무리기도 하고, 혹시 해외여행을 한 번도 가지 못한 게 '가난'의 상징이 되진 않을까 싶어 지레 변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이렇게 답했다.
"그냥 어쩌다 보니까요. 국내에서도 할 게 많았어요."
이게 솔직한 답변이었다. 나와 달리 나의 가족이나 남편은 해외여행을 좋아했지만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외국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할 건 많았고 딱히 따분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그런 이유로 외국에 나가는 건 아니지만.)
결국 나는 업무 시간에 여권을 발급하러 가게 됐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상당히 몰골이 추레했는데, 그 모습 그대로 가까운 구청으로 향했다. 시간이 없어 구청 앞 사진관에서 여권 사진을 찍었는데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여권 사진은 흰 배경에서 찍어야 하는데 그날 딱 흰 옷을 입었던 것!
다행히도 넥 카라 부분에 검정색이 섞여 있어서 어찌저찌 눈속임으로 흰 배경은 해결했다. 하지만 이번엔 귀가 안 보였다. 여권 사진엔 양 귀가 나와야 하는데 귀가 작은 편이라 아무리 해도 귀가 다 나오지 않았다. 시간은 촉박한데 사진을 계속해서 다시 찍다 보니 불편하고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찍은 나의 첫 여권 사진은 지금 봐도 최악이다. 마치 '머그샷'을 연상케 하는 무시무시한 표정과 그림자 진 얼굴을 보면서 첫 단추를 잘못 꿴 느낌이 들었다. 정말 그래서일까. 첫 해외 출장은 피곤하기만 했고 그 뒤로 간 여행들도 여행지보다는 함께 한 사람과의 추억이 더 진하게 남았다.
해외여행을 권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진절머리 나기도 했다. 나이가 차면 무조건 외국에 나갔다 와야 하고, 휴가 때는 무조건 해외 여행지를 물망이 올리는 것이 당연해진 게 희한하게 느껴졌다.
요즘은 어린 학생들도 방학 때 어느 나라에 여행 다녀왔는지를 서로 묻는다고 한다. 개근을 하면 오히려 가난하다는 인식이 있을 정도라는 얘기도 들었다. 이제는 해외여행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상이 된 셈이다.
나는 지금도 해외여행을 '아주' 좋아하진 않는다. 이십 대든 삼십 대든 몇 살이든 간에 여권이 없다 한들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국내도 안 가본 곳 천지고, 해외여행 없이도 삶을 꽉꽉 채울 수 있는 건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런 내가 해외여행을 두 팔 벌려 환영할 수 있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꽤 먼 여행지에 연달아 다녀오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처음엔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고 놀랐고, 그다음엔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다니!' 하며 감탄했고, 그다음엔 '몰랐던 세상을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새로운 자극에 눈을 떴다. 전혀 다른 세상에 발을 들일 때의 짜릿함, 새로운 사람과 문화를 배우며 느끼는 참신함,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해방감을 경험했다. 그전에는 이 세상에 대해 '먼지' 정도 훑었다면 이젠 '밤톨' 정도는 알아가는 기분이다.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나면 생각도 청량해진다. 나만의 글을 쓰고 전에 없던 이색적인 시도를 하고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 오지선다인줄 알았던 답안이 사실은 주관식이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제 해외여행이 조금씩 좋아진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들판을 숨차게 뛰어보기도 하고, 영화 <판의 미로>에 나올 법한 산속을 헤집어 보기도 하고, 투명하게 찰랑거리는 바닷물을 눈에 담아보기도 하는 거다.
'이런 건 한국에도 있어', '한국 음식이 더 맛있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드는 대로 가만히 둔다. 다만 나를 새로운 곳에 내던져 보는 거다. 정갈한 한식만 먹다가 불닭볶음면을 후루룩 삼키며 눈물 콧물 터져 보면, 새로운 맛에 눈이 뜨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