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에선 주인공이 잠시 신이 된다. 수프에 홍해의 기적을 일으키고 아주 손쉽게 깡패들을 두들겨 패준다. <인셉션>에서는 상상한 대로 모든 것이 이뤄지는 꿈의 세계가 펼쳐지고, <거짓말의 발명>에선 거짓말을 못하는 세상에서 주인공이 원하는 바를 거짓말로 얻어낸다.
생각하는 대로, 상상하는 대로, 내 의지대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세상은 흥미롭다. 그렇기에 '판타지'에 기반한 창작 소재는 끊이질 않는다. 매일 틀에 박힌 일상을 보내거나, 소심해서 자신을 바짝 숨기고 사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재밌는 이야기다.
지난 주말에 본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계속해서 생각나는 이유도 그렇다. 월터는 '라이프' 잡지사에서 16년 일한 성실한 직장인이다. 그는 수동적이고 소심하지만 책임감이 강해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 부당하고 부담스러워도 감내한다.
그에게 유일한 일탈은 '상상' 뿐이다. 틀을 깨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극적인 상상을 시시때때로 한다. 갑자기 상상이 들면 멍하니 그 생각에 빠져 현실과 차단된다. 그런 월터의 모습을 비웃는 이도 있고, 걱정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월터의 상상은 계속된다.
출근길 개 짖는 소리를 듣고 갑자기 '핸콕'처럼 어느 건물 창문으로 날아들고는 화재를 막고 개를 구하는 영웅이 된다. 잡지 표지로 들어가 설산을 오르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직장 상사를 창 밖으로 내던지기도 한다. 그는 오로지 상상 속에서만 분출하고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갑자기 잡지사가 폐간되고, 마지막 호 표지에 실을 사진을 찾아 나서면서 현실 속에서 상상과도 같은 일들을 경험한다. 갑자기 그린란드로 떠나고 헬기에서 떨어지고 폭발하는 화산을 피해 도망친다. 도무지 현실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경험이 줄줄이 월터를 찾아온다.
그 과정에서 월터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내고 원하는 걸 찾는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월터를 응원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상상에 빠지고는 현실로 돌아올 때 당황하는 그의 초라함에 위로를 보냈다. 그리고 멋진 경험을 해낼 때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검은색 화면 속에 비친 또 다른 월터가 남아 있었다. 나 또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라곤 상상뿐. 늘 하루를 꽉 채워 보내야만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일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상상 또 상상이다.
만원 버스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여 몸이 잔뜩 구겨지는 때엔 시원한 바다 앞 모래사장에 드러눕는 상상을 한다. 하루종일 앉아 있어 허리가 아픈 날엔 뉴질랜드 어느 들판을 숨찰 때까지 뛰는 상상을 하고,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는 야근이나 회식 자리에서 발목이 잡힐 땐 한적한 산골 오두막에서 곶감을 먹는 상상을 한다.
현실에서 내가 원하는 바를 상상하기도 한다. 수십 억 로또에 당첨돼서 대단한 걸 사거나, 내가 원하는 일로 인정받아 파티를 열거나, 내가 꿈꾸던 내가 되어 마음껏 누리는 상상도 한다. 돈 안 드는 일탈이지만 무료 체험버전이라 짜릿함이 금방 만료되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한껏 상상을 하고 나면 괜히 슬퍼지기도 한다. 나의 일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전제가 더 명확해지는 기분이다. 어쩌면 나도 월터처럼 갑자기 회사를 뛰쳐나와 한 번 도 가 본 적 없는 세상으로 떠날 수도, 아주 어릴 때 즐겼던 롱보드를 타고 꿈을 향해 미끄러질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그런 일탈의 순간이 올까?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탈탈 털어낸 뒤 새로 시작하는 때가 올까?
고개를 저으면서도 괜히 웃음이 난다. 어찌 됐든 확실한 건, 나는 내가 잘 됐으면 좋겠다. 상상 속 나는 남이 되고 싶었던 적이 없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도 남과 나를 바꾸고 싶지도 않다. 내 상상 속 내가 되어 더 크게 웃고 싶을 뿐. 그러니 오늘도 상상을 멈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