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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십대 제철 일기 Aug 10. 2024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상상력을 발휘하는 시간!

미국 여행을 할 때 2층 짜리 버스에서 어떤 여성분이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었어요. 너무 냄새나고 싫었는데 만약 내 영화 속 주인공이라면 너무 사랑스럽게 그리고 싶은 인물인 거예요. 그렇게 보니까 싫은 사람이 없어요 이제. … 만약에 누가 너무 미우면 사랑해 버려요.


영화감독 이옥섭 씨가 <서울 체크인>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한 말들이 가슴에 남는다. 그녀의 말에 연인인 구교환 배우가 맞장구쳤다. "너무 미우면 그러는 게 편해요"라고.


이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너무도 성숙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사람은 가지지 못한 것에 선망을 갖고 동경한다. 내게 없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그들이 마치 세상에 없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마치 어느 영화나 소설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 것처럼.


나는 내가 미워하는 이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이옥섭 감독은 자신이 품은 마음의 출발을 '연민'이라고도 표현했다. "연민을 갖고 서로 생각하면 편한 것 같다"라고. 그녀가 미국 여행 중에 만났다던 여성을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잔뜩 지친 몸을 이끌고 2층 버스에 올라타 겨우 쉬려는데 좁고 퀴퀴한 버스 안에서 매니큐어를 바른다면?


떠올리자마자 미간에 주름이 졌다. 배려 없고 민폐를 끼치는 건 딱 질색인데. 그래도 상상을 더 이어가 보도록 하자. 그녀는 손톱과 발톱 모두에 매니큐어를 바르더니 노래까지 흥얼거린다. 맨 발을 까딱거리며 매니큐어가 다 말랐는데도 양말을 신지 않는다. 이건 너무 하잖아.


그녀는 어떤 옷을 입었을까. 화려한 꽃무늬 패턴의 점프 슈트. 얇고 부들부들 거리는 재질의 옷이다. 갈색 웨이브진 긴 머리카락은 똥 머리로 높게 묶고, 입 안에는 향기 나는 풍선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다. 흥얼거리는 노래는 풀스 가든의 '레몬트리'.


화장기 없는 얼굴이지만 뺨과 입술을 적당히 붉다. 갑자기 2층에 있던 남성이 1층에 있는 그녀에게 흥얼거리는 것 좀 멈출 수 없냐며 빽 소리 지른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2층을 향해 진심으로 사과를 건넨다.


"미안해요. 처음 떠나는 여행이라 너무 들뜬 거 있죠? 이제 이어폰을 끼고 조용히 갈게요. 혹시라도 내가 또다시 흥얼거린다면 아래층으로 물을 부어도 좋아요. 정말로요!"


미소가 피식 나온다. 이렇게 시작하면 되는 걸까? 이옥섭 감독은 그녀를 어떤 영화의 어느 캐릭터로 만들어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내가 미워하는 이들을 사랑하려면 이렇게 상상력을 발휘하면 되는 걸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는 나를 힘들게 한 이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연민을 보내며 내가 보지 못한 면을 보는데 시간과 정성을 쏟을 수 있을까. 내가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들도 나를 사랑할까. 오늘도 상처 투성이 세상 속으로 뛰어들기 위해 물음표를 잔뜩 끌어안고 새로운 시도를 해 본다.

(※대문 사진은 유튜브 TVING [서울체크인] 8화 영상에서 캡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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