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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십대 제철 일기 May 25. 2024

나는야 어른이

사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쓸데없는 것 좀 사지마."
"뭐? 내가 쓸데없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나의 서른은 물 번짐 같았다. 비었던 잔에 마침내 물이 가득 차면서 넘실거리던 무렵, 똑 떨어진 한 방울에 삼십대로 번져들었다. 내가 번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그때의 나는 여전히 유치하고 겁이 많고 어설펐다. 하지만 삼십 대 중반쯤 되자 나는 또 다른 잔으로 주르룩 흘러 들어가 더욱 커다래진 잔을 다시 채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종종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원작의 애니메이션을 떠올렸다. 이야깃 속 앨리스는 회중시계를 가진 토끼를 따라갔다가 정체 모를 음식을 먹고 몸이 아주 작아져 유리병 속으로 빠진다. 그리곤 직전에 (몸집이 아주 커졌을 때) 흘렸던 눈물 웅덩이를 둥실 둥실 떠다닌다. 나야말로 새로운 잔 속에 들어가 내가 만든 웅덩이를 자주 떠다녔다.


나이와 연차가 주는 부담감은 생각보다 컸다. 상사에겐 믿음직스러운 부하 직원이 되고 싶었고, 후배들에겐 친절하면서도 적당히 카리스마도 있는 선배이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 남도 기대치가 높아질수록 나의 웅덩이는 깊어져 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다가 겨우 퇴근해도 밖에서의 후회가 꼬리가 되어 살랑살랑 따라 들어와버리니 집에서조차 편하게 쉬질 못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바로
 '온-오프 스위치'.


나는 집에서만큼은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걸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외출 모드를 끈 나의 모습은? 아주 유치 뽕짝 그 자체. 나는 사치품도, 실용적인 물건도, 가졌을 때 별 감흥이 없다. 그렇다고 물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더 좋아하는 게 따로 있다. 누군가는 유치하고 한심하다며 혀를 찰 지도 모르지만…!


나의 행복은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예쁜 노트와 스티커, 귀여운 틴케이스, 오르골에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가득 담은 나만의 보물 상자도 여러 개 있다. 그리고 일기 쓰는 시간을 사랑한다.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답답할 때 혼자만의 공간에서 고요히 숨겨 두었던 감정을 꺼내보는 시간이 소중하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매일 새롭게 다가오는 어려움들이 제 때 겪는 나의 인생이 아닐까, 싶어서 다시 브런치를 다. 그렇게 시작하는 '삼십대 제철 일기'. 아직도 어린왕자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고, 당황스러운 순간엔 짱구의 '어떡하지' 송을 부르는 (물론 속으로) 나는, 삼십 대가 무르익을수록 본격적으로 유치해지기로 했다.

브런치 프로필도 비교적 얌전한 사진으로 설정해 놨지만… 원래는 어린왕자와 사막여우를 친구 삼은 사진이었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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